동문기고
서혜경 - 인터넷의 그림자
[매경춘추] 인터넷의 그림자
- 서혜경 / 피아니스트ㆍ경희대 교수 -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봄 미국으로 초청을 받고 당시 유행하던 미국산 자동차를 사겠다는 욕심에 급히 새로운 작품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불과 6개월 만에 피아노 협주곡 사상 가장 방대한 걸작을 만들어 그해 10월 6일 인쇄도 되지 않은 필사본을 들고 뉴욕의 부두에 내렸다. 이 글은 로버트 워커의 책 `위대한 작곡가의 초상-라흐마니노프` 65쪽에 있는 내용이다.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연도와 날짜 확인을 위해 책을 찾았으나 눈에 띄질 않았다. 쉬운 방법으로 인터넷을 뒤졌더니 대부분 단편적이고 원론적인 내용들뿐이었다. 구글에도 위키피디아에도 위의 인용문만큼 세세한 내용은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부정확한 내용들이 인터넷의 바다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도 매일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고 컴퓨터의 정확성과 신속성, 편의성에 감탄하고 있지만 단선적인 잡동사니 정보들이 이렇게 넘쳐나고 있을 줄은 몰랐다.
TV 뉴스 30분을 다 받아 써도 뉴욕타임스 한 면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화려한 화면과 잘생긴 앵커들의 능란한 화술에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남는 것 없이 손아귀 속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흘러내려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영상정보와 디지털 정보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정보의 부작용은 인스턴트성과 휘발성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심사해보면 인터넷에 범람하는 온갖 정보들의 짜깁기에는 참으로 능하다. 그러나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능력을 소유한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건과 현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정리하는 힘이 결여돼 있는 것이 요즘 인터넷 세대의 공통된 현상인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 길이 남을 커다란 족적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해 보자. 신참 화가에서 불과 10년 만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은 미술사의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직관으로 자연의 본질을 파고들어 만들어낸 빛과 색채의 향연! 이것이야말로 고흐가 시대를 초월해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요즘 같이 디지털 유목민이 넘쳐나는 시대에 고흐 같은 사색의 농경민족이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매일경제 2009-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