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경-가장 어려운 악기


동문기고 서혜경-가장 어려운 악기

작성일 2009-03-17

[매경춘추] 가장 어려운 악기 
 
- 서혜경 피아니스트 / 경희대 교수 -
 
피아노는 세 살배기 아기가 눌러도 정확한 소리가 나니 가장 쉬운 악기이고, 나같이 40년 이상 노력을 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으니 가장 어려운 악기이기도 하다. 탁구 라켓은 채가 짧아 감각을 느끼기 쉽고 조절이 용이하다. 골프채는 채가 길어 손이 조금만 움직여도 헤드는 채 길이에 비례하여 큰 각도로 움직인다. 아마 피아노는 골프채보다도 훨씬 손잡이가 긴 악기일 것이다. 피아노 해머가 줄을 때리기까지에는 손끝에서부터 수십 개의 부품이 움직인다. 그러니 그 많은 기계적인 부품을 움직여 멀리 떨어져 있는 강철 줄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서혜경쯤 되는 사람도 연습을 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온 세상이 안다는 말이 있다고. 한 시간 반의 독주회를 열기 위해 연주가가 외워야 하는 음표는 대략 5만~6만개가 될 것이다. 200자 원고지로 따진다면 250매 이상이다. 이만한 분량의 악보를 외우기 위해선 보통 두 달 이상이 걸린다. 머리로 외우고, 심장에 바늘땀을 놓듯이 가슴으로 외우고, 그래도 잊어버릴 때는 손가락이 자동으로 돌아가도록 외워야 한다.

어찌 피아노만 어려운 악기이고 힘든 분야이겠는가? 며칠 전 울산 현대 예술관에서 연주회를 하기 전에 현대중공업을 방문하여 배 만드는 과정을 구경한 일이 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수백만 개의 부품을 조립하여 산더미만 한 배를 만드는 모습이 정말로 장관이었다. 아니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황량한 모래 벌판에 조선소를 세우고 세계 최대 최고 배를 만들기까지의 노력을 생각해보라. 그 이들이 흘린 눈물과 땀을 생각하면 피아노를 향한 내 노력이 초라해 보이기조차 하였다.

나라를 경영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들은 연주자가 악보를 외우듯이 4800만개의 음표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듯이 4800만개의 부품을 얼마나 잘 조립하고 있는지? 국가 경영은 4800만개의 부품을 거쳐 마지막 피아노 줄에서 화합과 감동의 하모니를 연출해 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예술일지도 모르겠다. 제발 심장에 바늘땀을 놓는 노력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주시기 바란다.

[[매일경제 2009-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