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최혜실-[세상사는 이야기] 그 의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세상사는 이야기] 그 의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병원서 머리 다친 엄마 혼수상태
담당의사, 자기 정당화하기 급급
남의 운명 좌우하는 지적권력자들
- 최혜실 /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엄마가 혼수상태다. 심한 저혈당으로 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동생의 질문에 담당 의사는 상황을 지켜보자고 이야기했고 몇 시간 뒤 문제가 없자 엄마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구토를 일으키며 응급차에 실려 간 엄마의 뇌는 이미 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에 걸친 뇌수술 후 엄마는 깨어나지 않는다.
뇌출혈은 처음 몇 시간 동안은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넘어졌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 연구실로 들어간 후 퇴근했다가 다음날 숨진 여교수도 있었다. 초기에 증상이 없었어도 CT를 했어야 마땅했다.
오랫동안 당뇨로 고생하신 우리 엄마,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병원에서 한방치료를 받아보자고 권유했어도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자식들이 넷이나 나온 S대학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다는 것이다. 엄마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던 그 잘난 대학의 병원에서 엄마는 방치되고 무시당한 채 저런 몸이 돼버린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몸을 문질러 봐도, 심지어 팔을 꼬집어 봐도 엄마는 깨어나지 않는다. 먹고 입고 배설하는 모든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코를 골고 자고 있을 뿐이다.
박박 깎인 머리에는 두 번이나 잘려 꿰매진 자국이 지렁이처럼 벌겋게 나 있다. 목은 뚫려 호흡기가 꽂혀 있고 코에는 미음이 들어가는 호스가 꽂혀 있다. 배에는 신장 투석을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체실험이 이렇게 잔인할까. 환자에 대한 사랑이, 배려가, 소통이 없는 이 장소에서 몸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고, 꿰매는 행위가 생체실험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단순한 신경과민일까.
당시 엄마를 담당했던 여의사는 자신은 최선을 다 했다고 이야기했다. 미안해하거나 반성하는 기색도 없는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며 냉정하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만 돌려가면서 했다. 그 여자는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에게 무관심했고, 걱정하는 내 동생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물론 피곤했을 것이다. 의사도 사람이다.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순간적인 판단착오나 오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신이 잘못한 후에도, 호소하는 우리에게 끝까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환자와 교감하려 하지 않았고 소통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환자들을 한갓 논문의 사례로 이용할 생체실험용 동물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의 인간 도살자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환자를 객관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과 사물로 대하는 행위를 혼동하는 사이코패스적 심리.
오늘도 침대 옆에서 엄마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앞치마를 둘렀으며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마른 장작 같은 엄마의 몸에 로션을 바른다. 엄마가 좋아하는 ‘겨울연가’의 주제곡도 들려줘 보고 귀에다 대고 쓸데없는 소리도 지껄여 본다. 그러나 엄마는 반응이 없다.
나는 환상을 본다. 아래층 응급실로 내려가 그 때꾼한 눈의 여의사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쓰러뜨린다. 그리고 쿵 소리가 날 때까지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여기에 수십년 동안 겪어온 병원에서의 악몽이 더해진다. 진료 하느라 한 시간, 약 타느라 한 시간 기다리는 시스템의 끔찍한 비능률성, 질문 하나 하기도 어려운 귄위의 화신, 외국어 같은 의학용어로 우리를 엄청나게 주눅 들게 하는 의사 선생님의 소통 불능성, 질문마다 톡톡 면박 주는 간호사 언니들. 머리채를 쥔 내 팔에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이 사회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지적 권력자들이 있다. 의사나 법조인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만큼 많은 힘을 지니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존경과 부를 누리는 만큼 자신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절실한 시점이다.
[[세계일보 2009-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