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재욱-출총제 폐지, 조건 달며 미룰 일 아니다
<포럼> 출총제 폐지, 조건 달며 미룰 일 아니다
- 안재욱 / 경희대 대학원장·경제학 -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에 상정돼 있다. 지난 연말 여야가 2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하기로 약속한 사안이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이 출총제 폐지의 조건으로 이중대표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집단소송제도 확대 등 사후 규제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출총제를 폐지하면서 그러한 제도들을 도입하는 것은 잘못이다. 출총제 도입의 근본 목적은 경제력 집중 억제였다. 그러나 이중대표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등은 경제력 집중 억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주 보호, 소액다수의 피해자 구제, 부당행위에 대한 사전 억제 차원에서 논의되는 제도다. 따라서 출총제 폐지의 보완책으로 이들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다.
게다가 출총제는 충분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효율적인 기업의 진입을 막는 진입 규제로서, 경쟁을 억제하고 창의적인 기업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경제의 효율성과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저해해 왔다. 그래서 투자 활성화와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출총제는 진작 폐지됐어야 했다. 그런데 출총제 폐지의 조건으로 이러한 제도들을 도입한다면 오히려 기업 경영에 혼란을 가중시켜 투자가 저해되고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중대표소송이란 자회사 경영진의 위법행위에 대해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를 대신해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을 말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자회사의 경영진들은 소송의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에 위험은 크지만 수익성이 높은 사업에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위험성이 있는 의사결정을 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경영을 위축시키고, 기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어 악의적인 소송이 남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소비자에게 위해를 끼친 기업에는 실 손해액 외에도 징벌적 의미로 그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권익을 최대한 보호하도록 하는 예방적 조치로서의 기능보다는 이중대표소송처럼 악의적인 소송의 남발로 인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경향이 많다. 워싱턴 타임스가 1997년 4월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징벌적 손배제도를 도입한 미국에서 과다한 징벌적 손해배상이 두려워 미국 기업의 47%가 제품 생산 중단, 25%는 신제품 연구개발 중단, 39%가 새로운 제품의 출시를 포기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대표 당사자가 되어 다른 피해자들의 명시적 위임 없이 그들을 대표해서 제기하는 소송이다. 2005년 1월1일 증권 분야에 집단소송제가 시행됐는데 이를 사회 전 분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 제도는 원고가 다수이고 난도(難度)가 높아 거액의 보수가 변호사에게 지급되는 반면,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손해배상의 액수는 미미해 실제로는 당사자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기업평가 시스템이 잘 발달돼 있지 않고 소문에 민감한 우리 현실에서 집단소송이 제기되면 회사에 관한 악성 소문이 돌아 경영 활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지금 글로벌 경제위기로 투자가 줄고 기업들은 사활(死活)을 건 투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때 출총제와 논리적 연관성도 전혀 없는 이러한 제도들을 출총제 폐지의 조건으로 도입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 활동에 큰 부담을 주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출총제는 조건 없이 폐지해야 마땅하다.
[[문화일보 2009-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