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이-민주주의는 생활정치에서 시작되어야


동문기고 윤성이-민주주의는 생활정치에서 시작되어야

작성일 2009-02-23

[열린세상] 민주주의는 생활정치에서 시작되어야

- 윤성이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국정치론’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다. 서구 국가들은 수백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민주주의에 이르렀지만,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직 60년에 불과하다고. 제3세계 국가 중 가장 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것이 대한민국이라고. 한 학기 내내 한국 정치에 대한 비판과 질타를 들으며 행여 좌절하거나 외면할까 우려해서다.
가장 낙후된 분야로 지탄받는게 우리 정치다. 이제 겨우 60년이 되었을 뿐이라고 위안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우리 민주주의가 더 나아질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여야 간 싸움이 잠잠해지니 이제 당내에서 계파간 힘겨루기를 할 모양이다. 대선 후 외유에 나섰던 여야 거물급 정치인들이 귀국 의사를 밝히자 각 계파는 향후 당내 권력구도에 미칠 파장을 계산하느라 분주하다. 4월 보궐선거 공천권을 둘러싼 당내 갈등도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 같은 계파정치와 공천갈등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공천을 둘러싼 계파갈등을 원없이 보여 주었다. 크고 작은 선거마다 공천싸움은 어김없이 벌어진다.

후진 정치의 반복이 정당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달 초 한국수자원공사가 주최한 경인운하 주민설명회는 찬성 측 인사들만 참석한 채 파행적으로 강행됐다. 설명회장 앞에서 반대 측 시민단체 회원들과 격한 몸싸움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이다. 9년 전 2000년 3월에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때도 역시 경인운하 환경영향평가 공청회장이었다.

세월이 흐른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정치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소수에 집중된 권력을 일반 국민들에게 분산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계파정치가 끊이지 않는 것은 유력 정치인에게 집중된 권력구조 때문이다. 국회의원 공천권이 계파 수장이 아닌 유권자에게 있을 때, 지방의원 공천에 국회의원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계파정치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정부와 시민단체의 몸싸움 역시 왜곡된 정책결정 시스템 때문에 반복된다. 효율성을 내세우는 정부에 공청회를 통한 여론수렴은 소모적이고 성가신 절차일 뿐이다. 시민단체도 정부에 대항해 싸우기 바빠서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정작 이해 당사자인 주민들은 뒷전이고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의 몸싸움만 전면에 나타난다.

모든 것이 중앙에 집중된 것이 문제다. 사회갈등도 전국적 조직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한다. 그럴 듯한 논리와 구호를 앞세워 여론을 선점하는 것이 우선이다. 모두가 민생을 외치지만 들여다보면 알맹이는 없이 현혹하고 선동하는 구호일 뿐이다. 내 삶과는 동떨어진 구호를 외치며 싸움판을 벌이니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리 없다. 시민이 외면한 정치는 늘 그 타령일 수밖에 없다.

싸움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주민들이 서야 한다. 구호가 아니라 실생활의 문제가 사회이슈로 다뤄져야 한다. 온 국민을 매료시킬 현란한 수사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실천하는 작은 몸짓이 모일 때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함께하는 생활정치를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의 새 출발은 생활의 터전인 지역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주민들이 함께 지역문제를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찾는 미국의 타운 홀 미팅이 좋은 사례이다. 생활 이슈를 토론하는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주민들은 소통의 기술을 익히고 이견 조정의 합의 문화도 만들 수 있다. 정부나 국회도 아래로부터 수렴된 여론 앞에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자면 유권자나 주민들이 실망스러운 정치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까마귀 우는 골에 백로야 놀지 말라 하지만 그러면 산야는 온통 까마귀 판이 될 것이다.

[[서울신문 2009-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