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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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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TV 방송에서 심리학자가 마음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그 방송을 청취하면서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는 환자의 병(病)과는 사뭇 다른 성분의 약을 특효약이라며 이 약을 복용하게 되면 병이 완쾌될 것이라고 믿음을 주면 그 환자의 병이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환자는 그 의사의 말을 믿으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통해 치료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노시보 효과’ 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적절한 처방으로 적절한 투약이 되어 복용하더라도 의사와 약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으면 약의 성분에 관계없이 치료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쉽게 자기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례로 자신의 입장에는 잘못된 사실도 그렇지 않게 합리화 시킬 수 있고 또 그것을 기정사실로 굳히기까지 하려고 한다.
또한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용납하려고 하면서도 남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티끌만한 잘못이라도 가차 없는 평가의 잣대를 마구 휘둘러댄다.
어떤 사람이 행여 내게 불이익을 가져다주었을 경우 앙갚음을 먼저 생각했다면 당연히 미움의 마음이 생길 것은 분명한 이치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인생의 배움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앙갚음은 계속되는 갚음의 윤회를 낳게 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코드를 가진 것들이 서로 알아보고 자석처럼 붙어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피가 피를 부른다는 말과도 같다.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나’ 에게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잠재되어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을 선하게 계발시킬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한 생각에 달렸다. 다시 말해 나를 피폐한 영혼으로 치닫게 할 것인지 아니면 나와 더불어 남까지 다 밝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달렸는데 그 생각을 선택하는 것도 오직 남이 아닌 나 자신 뿐이다.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해 도를 닦는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는 무엇인가? 도(道)가 무엇인가? 하고 던지는 물음에 대선사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씀이 있다.
“네가 곧 부처니라, 먹고 자고 똥 누는 일이 도이니라.” 즉 내가 사는 일상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감사도 느낄 줄 모르고 심지어는 나와 내 이웃을 사랑도, 용서도 하지 못하면서 신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은 자갈돌을 물에 던지면 가라앉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떠올라라, 떠올라라 하며 합장을 하고 기도하고 간구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뭔가를 잘못했을 경우 “나도 안 그러려고 했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처럼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업 식’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지나왔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알게 모르게 내 무의식의 저변을 견고하게 형성시켜 놓고 있다가 때가 무르익어 과거의 인연들을 만나게 되면 연기처럼 스멀스멀 그 ‘업 식’들이 풀려나와 이런 일, 저런 일들이 내 앞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善業) 나쁜 일,(惡業)을 저지르면서 산다. 선한 업을 저지른 결과는 좋은 일로 오고, 악업을 저지른 결과는 좋지 않은 것이 닥쳐오게 된다.
어려서 잘 알지도 못하고 저지른 업이라도 이일로 인해 고통 받은 상대방은 그것을 은연 중에 마음에 새겨두게 되고 그 마음이 녹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업의 부메랑이 되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은 대로 받는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내게 닥친 일에 대해 ‘아나’라는 것이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하고 인정할 줄 알며 설사 내가 상대로 인해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언젠가 어느 생(生)에선가는 ‘내가 저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한 적이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인연을 내가 먼저 녹이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선업’이 되지 않겠는가.
본래 공(空)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다 나왔으니 이 악연을 녹일 수 있는 자리 역시 그 공(空)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인 심성(深性)이다.
자기가 달라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생각을 바꾸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거친 업(業)의 수레바퀴가 얼마나 더 많이 돌고 돌아야 할지....모두가 ‘노시보 효과’를 보는 불신(不信)의 환자가 사는 세상 같다.
모 지역 친목단체가 최근 회장선거를 잘못하면서 10년간 지속되어 왔던 조직이 두 개의 조직으로 분열 됐다. 문제는 모두 다 마음을 비우고 가슴을 열자고 하면서도 정작 마음을 비우고 가슴을 열 사람(신임회장)이 자기 착각에 빠져 자신을 합리화 시키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자기 한 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게 다 원만하게 해결 될 수 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명예를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괴롭고 아픈 상처를 안겨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찌 생각하면 모든 이들을 번뇌하게 만든 것 또한 악연이라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번뇌는 과욕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 번뇌를 벗어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깊은 수양을 쌓아 ‘물욕’ ‘성욕’ ‘명예욕’ 을 버리고 ‘고행’ ‘사색’ ‘득도’ 로 가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속인(俗人)이 도달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또 하나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감히 바꿔 나가라”는 고대 그리스인의 현인 에픽테토스가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108번뇌 가운데 98개는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작정하면 98개의 번뇌가 사라진다.
live one day at a time(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모든 것을 다 잊고 빈 마음이 되어 오늘 하루의 생활에 충실한 것만이 모든 번뇌를 벗어나는 길이며 그것이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리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지난 16일 오후 선종(善終)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으며 용서하지 못한 나 자신의 교만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배를 길게 깔아 엎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