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애-갈등을 넘어서는 저널리즘


동문기고 김성애-갈등을 넘어서는 저널리즘

작성일 2009-02-18

[옴부즈맨 칼럼] 갈등을 넘어서는 저널리즘

- 김성애 / 경희대학교 대학원보 편집장 - 
 
영화 워낭소리에서 수명이 15년밖에 안 되는 소도 사랑의 힘으로 40년을 버텼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평생 갈등과 반목 속에서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지 못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언론에서 비쳐지는 국민과 정부, 경찰은 모두 상처 입은 모습이다. 대화와 설명이 있어야 할 곳에는 근거 없는 주장과 서늘한 언어의 폭력이 난무하고, 용서와 반성이 있어야 할 곳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몰아세우기가 옹골차게 자리 잡는다. 모두가 한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대로, 우리는 정말 유별나게 불행한 사람들의 사회를 살고 있는 걸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직은 저널리즘에 희망을 걸게 된다. 펜 자국 밑에 진실의 향을 녹일 줄 알고, 갈등 뒤에 놓인 본질을 통찰하는 건강한 저널리즘이 우리 사이에 놓인 갈등의 문턱을 낮추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신문의 보도 프레임을 분석한 많은 연구들은 언론이 ‘갈등 프레임’을 주도적으로 사용한다고 보고한다. 일례로 부안 사태를 분석한 이현우의 논문을 보면, 신문이 주로 갈등 프레임(31%), 문제 해결 및 모색 프레임(24%), 감성자극 프레임(18%)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갈등 부각을 통한 감성의 자극은 사건의 핵심을 표면적 갈등으로 이동시키고, 독자들의 분노를 낳게 한다. 동시에 사건의 본질은 사실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주 서울신문은 용산 사태를 바라봄에 있어 사실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였다. ‘시너 30초 뿌린 뒤 3층서 화염병 터져’(2월10일자) 기사는 검찰이 발표한 사건의 흐름을 시간대별로 추적하고 있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시점에서 사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언론이 놓쳐서 안 될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해소되지 못한 의혹들’(2월10일자) 기사는 그럼에도 제기될 수 있는 의혹들을 통해 저널리스트로서 재조사를 시도하고 있다. 진압 당시 소방 및 진압장비가 갖춰져 있었는지, 진압으로 인한 화재와 사망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또한 경찰은 책임추궁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짚고 있다. 무엇보다 ‘세입자 관련법 잘 만들어 달라’(2월11일자)는 기사는 용산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발전적 정책을 논하는 데 할애하고 있어 높이 살 만하다.

그동안 서울신문은 꾸준히 용산 문제를 보도해 왔다. ‘80년대도 철거민 5명 죽는 참사 없었는데’(2월9일자), ‘경찰 법집행 매도 서글퍼’(2월11일자)는 각각 철거민과 경찰이 흘리는 눈물을 조명하고 있다.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 돌아서서 흘리는 그들의 눈물을 조명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진정성 있게 양측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고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용산참사 사건이 점차 김석기 한 사람의 사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김석기 용산 늪’(2월9일자), ‘김석기 도의적 책임 결국 낙마?’(2월10일자), ‘김석기 사퇴로 용산문제 마감돼야’(2월12일자) 등의 기사에서는 동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조직 내부에 대한 통절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정부당국자들을 꼬집는 내용을 추가했어야 했다.

야당은 여당을 향해 사이코패스 정권이라고 비방하고, 여당은 상처 입은 폭압자의 모습으로 비쳐져 가는 듯하다. 그래서 국민은 정부를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준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격장애자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서울신문 2009-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