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최혜실-‘진짜 엄마’를 부탁해
[세상사는 이야기] ‘진짜 엄마’를 부탁해
유명 소설 속 어머니들엔 공통점
무한한 사랑과 지혜·온화함 갖춰
현실선 신경질도 내는 서툰 존재
모성신화 벗고 ‘진짜 엄마’ 찾아야
- 최혜실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
유명 소설가들의 자전적 작품이나 수필에 등장하는 ‘고향’과 ‘어머니’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두 단어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했고 이제 떠나온 그곳에는 여전히 어머니가 계시다. 서울의 바쁜 일정 때문에 자주 가보지 못하는 무심한 자식이지만 고향과 어머니는 늘 자신을 기다리며 반겨 맞을 준비가 돼 있다.
작품의 곳곳에서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일화가 나온다. 반항하며 학교를 뛰쳐나온 아들을 끝까지 믿으며 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자식이 걱정할까 봐 치명적인 병을 끝까지 감추며 저세상으로 떠난다. 서울로 모시겠다는 데도 끝까지 고향을 고수하신다. 늘 자식 생각에 밑반찬을 끊임없이 올려 보내신다. 자식은 항상 일방적으로 전화를 하며 그때마다 어머니는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로운 답변을 해주신다. 정말 주눅이 들 정도로 훌륭한 어머니를 둔 작가들, 위인 뒤에는 비범한 어머니가 있기 마련인가 보다.
우리 엄마도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을 남 못지않게 길러낸 분이지만 그렇게 온유하고 희생적이지는 않으셨다. 다섯 자식의 도시락 일곱 개를 싸주는 틈틈이 힘들다며 신경질을 내셨고 어려운 형편에도 비싼 명품 화장품을 옷장 속에 감춰두고 혼자 쓰셨다. 공부 잘하는 자식과 못하는 자식을 은연중에 차별해 위화감을 조성했는가 하면, 완벽한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을 수시로 들먹여 우리의 기를 죽였던 서툰 엄마였다. 큰 소리로 부부싸움하기, 남편 흉보기, 지금도 며칠만 안부전화를 안 드리면 전화로 야단치고 집안 대소사에 딸들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그러나 과연 나만 그랬을까. 주변 친구들 중 엄마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 많다. 키워주신 은혜에는 기본적으로 감사하지만 엄마 또한 불완전하고 욕망을 지닌 존재여서 부딪치며 많이 상처받고 살았다는 점에 다들 동의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일류병에 오히려 자식을 망친 서툰 엄마,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비정한 엄마, 우울증에 시달려 자식을 살해한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엄마의 스펙트럼은 넓다.
엄마는 모기에 뜯기고 재래식 화장실에 고통을 받으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던 고향집의 기억만큼이나 현실적인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과연 서울의 생업을 어쩌지 못해 꿈에도 그리는 고향을 가지 못하는 것일까.
IMF보다도 어려운 시절이라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하며 그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서, 그 힘으로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지 모른다. 특히 인구증가율 세계 최하위국으로서 고령사회를 목전에 둔 한국으로서 ‘어머니’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조성되는 모성 신화는 오히려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현실의 엄마 역을 더욱 기피하게 할 뿐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하고 희생해야 하는 ‘직업’을 누가 가지고 싶겠는가.
사람들은 앞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시골의 고향 풍경을 한껏 치장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위안과 추억의 장소로 간직한다. 어차피 가서 살 곳이 아닌데 그곳은 개발되지 않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나을 터이다.
마찬가지로 모성의 신화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과 안식의 장소로서 우리를 위로하지만 그뿐이다. 젊은 여성들은 할 수 있는 한 힘껏 결혼과 출산 시기를 늦춘다. 한 명이 가까스로 넘는 출산인구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낳아 키운다는 자신의 정서적 만족에 부합할, 한 명이면 족한데, 이 정도면 헌신적인 모성(母性)의 역할이 능히 감당할 숫자가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시대에 ‘진짜 엄마’는 과연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가족과 자신에게 배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이다.
[[세계일보 2009-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