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규-‘삐라’ 문제될 것 없다


동문기고 김찬규-‘삐라’ 문제될 것 없다

작성일 2008-10-21

[시사풍향계―김찬규] ‘삐라’ 문제될 것 없다 

- 김찬규 (대학원) / 경희대 명예교수·국제법 -
 

지난 10일 한 대북인권운동단체가 10만장씩의 전단을 넣은 대형 풍선 10개를 북한 지역으로 날려보낸 일이 있다. 그 풍선 안에는 미화 1달러 지폐 700장과 중국 돈 10위안짜리 지폐 130장도 들어 있었다.

'삐라'로 일컬어지는 전단은 6·25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가 북한 인민을 억압·착취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독재체제에 항거해 궐기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선전물들은 바람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북한 전역에 뿌려질 가능성도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런 방식의 선전물 북송은 최근까지 여러 민간단체에 의해 지속적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왔다.

심리전 파괴력에 예민해진 北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영국방송공사(BBC)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BBC의 콜사인을 모르스 부호로 표기하면 '…-'이고, 영어 알파벳으로는 'V'에 해당되며, 음향으로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테마가 된다. 전황을 알리는 보도에 앞서 내보낸 이 같은 콜사인은 독일군과 독일 국민에게 패전이라는 운명의 검은 그림자로 다가갔고, 연합군과 그 국민에게는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는 구실을 했다.

심리전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2일 남북 군사실무회담장에서 북한 대표는 예의 전단 살포를 맹렬히 비난하고 "이런 행위가 계속되면 개성공단과 개성관광에 엄중한 후과가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의 과민 반응은 전단 살포가 몰고올 결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전 행위는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는가. 민간단체들의 이 같은 행동을 금지해야 할 법적 의무가 우리에게 있을까.

1931년 1월19일 미국 해병대 소속 버틀러 소장이 한 연회에서 이탈리아 국가원수 무솔리니가 운전 중 사람을 치고 뺑소니쳤다면서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탈리아측은 미국에 항의했고, 미국 정부는 유감 표명과 함께 버틀러 소장을 견책했다.

1934년 2월19일에는 주미 독일대사가 히틀러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미국 국무부에 들러 자기들 국가 원수에 대한 무례하고 모욕적인 일이라면서 이를 중지토록 조치해줄 것을 요구했던 일이 있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행위자가 민간단체이며 미국에는 민간단체가 외국 국가 원수의 행적 또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없다면서 거절했었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를 보면 행위자가 공무원인지 민간인인지 여부, 그리고 그 내용이 진실인지 허위인지에 대한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 또는 그 지배자의 행적에 대한 평가나 정책 비판, 또는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규탄하는 도덕적 분노 표시 등에 대해서는 이를 금지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인 행위는 금지·처벌 不可

지난 1992년 2월19일의 남북 기본합의서에는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있다(제3조). 또, 2004년 6월 남북 장성급회담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민간인 또는 민간단체들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특히 후자는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당국자가 서로 비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데 불과하다.

북한측의 이번 항의와 관련해 통일부가 규제에 나서지 않고 주최측에 자제를 종용한 데 그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라고 본다. 민간단체들이 주도하는 행위에 대해 북한당국자들이 후과 운운하면서 위협적 태도를 보인 것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처사다. 그것은 '지나간 10년'의 부메랑 효과일 수도 있다.

[[국민일보 200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