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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실 - 한글 ‘세계의 언어’ 되려면
[시론] 한글 ‘세계의 언어’ 되려면
- 최혜실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영어 광풍,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 말이 많다. 특히 영어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우리말이 푸대접받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추진하는 쪽에서도 할 말이 많다. 국제화 시대에 한국인의 영어 구사 수준은 최하위이고 우수한 학생들이 영어 때문에 외국으로 조기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떠나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다. 영어 공용화라도 주장할 판에 몰입교육이 뭐가 나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영어교육을 강화하는 정부나 그를 바라보는 국민에게나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는 분명히 세계 공통의 의사소통 도구로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자국어에 대한 사랑은 근대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근대 교통 제도와 전화 등의 통신 기기가 사람들의 사유와 체험의 범위를 봉건제의 봉토 영역에서 국가의 범위로 확산시킨다. 이후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유지할 단합 요소로서 같은 언어 사용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니 세계인의 공통어가 필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국어에 대한 사랑 또한 국가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언어가 각각 다른 위치에서 중요한 것이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 과에는 지금 70명이 넘는 외국인이 유학을 와 있다. 그 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알고 싶다거나 한국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서 왔다고 답변한다. 경제 교류 및 한국어와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국제화 시대에 한국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세계적 보편성에 한국적 특수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일이다. 정치·외교·수출에서 경쟁력을 획득하는 방법은 세계인에게 한국을 ‘매력적인 나라’로 비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제품이 한국산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오히려 팔리지 않기 때문에 ‘한국’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철저히 국제화해야 하는 부분은 아직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의 한끝을 단단히 쥔 상황에서 다른 한쪽을 세계 속에 편입하는 전략이 유용하다.
그랬을 때 우리가 틀어쥐고 있어야 할 중요한 면이 우리의 역사·문화와 떼어낼 수 없는 한국어인 것이며 우리의 창조물인 ‘한글’은 그래서 중요하다. 세계인이 영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이미 ‘미국’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해버린다. 사람들은 영어를 통해 미국 문화와 역사·사회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의사 소통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반면 각국의 언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최근 한글의 세계화에 발맞춰 문화축제, 패션 쇼 등의 아이템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 한글 서체를 패션에 접목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가 있는가 하면 문자 예술가들은 한국적 질감을 담은 다양한 한글 서체를 개발해 보편적 조형미와 한국적 정취를 조화시키고 있다. 또 한글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용가도 있다.
이는 단순히 소통 도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스며 있는 한글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소중한 시도이다. 단순히 우리 것, 지켜야 할 자존심이란 감상이나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에 한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문화국가로서의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데 한글처럼 유용한 전략은 없다. 지켜야 할 것이라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자랑할 것, 활용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입장으로 발상의 전환을 할 시점이다.
[[세계일보 2008-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