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회-‘소나기’ 초본(初本)과 소나기마을


동문기고 김종회-‘소나기’ 초본(初本)과 소나기마을

작성일 2008-09-25

[문화마당] ‘소나기’ 초본(初本)과 소나기마을

- 김종회 (국문75/ 30회) / 경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

필자가 대학에서 한국 현대문학, 특히 소설 과목들을 맡고 있는 까닭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황순원의 ‘소나기’는 그 주제가 무엇인가요,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인가요?” 필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우리가 차마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조심스러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심정적 교감이지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우리들 모두가 ‘소나기’를 읽으며 말과 글을 배웠고 그 소설의 청신한 감동이 연륜을 더할수록 아련하고 애틋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별다른 이의 없이 이 소설에 ‘국민단편’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학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비단 작가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도 하나의 소중한 자산이다.

일찍이 작가 황순원 선생의 훈도 아래 문학을 익힌 필자는, 당신께서 ‘소나기’를 아끼는 작품으로 생각하되 대표작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도쿄 유학 시절 젊은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창작을 거쳐 다시 시와 함축적인 단편소설의 세계로 돌아간 선생은, 그 작품들의 대표성을 ‘일월’이나 ‘움직이는 성’ 같은 장편에 두었었다.

그러나 광복과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던 그 시기,1953년에 발표된 단편 ‘소나기’ ‘학’ 등의 작품은, 단편소설에서 장편소설로 넘어가던 무렵으로 작가의 단편 창작 기량이 천장을 치던 때에 생산되었다. 그냥 ‘소나기’요, 무심코 ‘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생을 문학 이외의 다른 곳에 뜻을 두지 않고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선생의 문학에는 ‘노년의 문학’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이는 ‘단순히 노년기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노년에 이르도록 지속적으로 작품을 쓴 작가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원숙한 분위기의 문학’이라는 뜻이다.

일제 말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수문학을 지킨 거목이요 작가의 인품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작가정신의 사표로 불리는 선생의 문학이, 우리 문학사에 의미 깊고 돌올(突兀)한 봉우리를 이룩한 것은, 곧 문학에 대한 처음의 그 순수한 열정을 끝까지 변절 없이 지킨 결과였다. 이 범박한 초발심(初發心)의 이치를 알면서도 그것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는 일은 어찌 그리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 황순원 선생과 소설 ‘소나기’를 기리는 한국 최대, 아니 세계 최대의 문학 테마 타운이 경기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 들어선다. 황순원문학촌-양평소나기마을이 그것이다.2만 5000평 야산에 3층 규모의 문학관이 건립되는데,‘소나기’를 비롯한 작품세계와 작가의 생애, 유품을 한눈에 볼 수 있고 광활한 야외에 소설 장면들을 상징하는 문학공원이 만들어진다. 내년 3월 개관을 앞두고 그간 5년에 걸쳐 황순원문학제가 개최되기도 했다.

근자에 ‘소나기’의 ‘원작’이라 할 만한, 다른 지면에 발표된 작품이 발굴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소나기’는 1953년 5월 ‘신문학’에 발표되었는데, 그보다 앞선 초본(初本)으로 보이는 ‘소녀’가 같은 해 11월 ‘협동’에 발표된 것이 발견된 것이다. 종전(終戰) 전후의 복잡하던 시기에 먼저 원고를 준 잡지가 발간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수정본을 다른 잡지에 준 것인데, 그 나중 잡지가 먼저 발간된 것으로 보인다.

황순원 선생은 판을 달리할 때마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읽으며 고친 분으로 유명하다. 그 수정본에서 결미 네 문장을 버림으로써, 단편소설로서 여백의 아름다움을 빛내는 ‘소나기’의 대단원이 형성된 셈이다. 온 생애를 걸고 성의와 진심을 다해 작품을 쓰고 그 어휘와 문장마다 혼을 불어넣은 작가정신! 뜬세상의 덧없는 모습들 앞에서, 새삼 큰 스승의 얼굴이 그리워 눈시울이 뜨겁다.

[[서울신문 2008-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