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국-사랑니에 대한 고정관념 뽑아라


동문기고 박영국-사랑니에 대한 고정관념 뽑아라

작성일 2008-05-14

[박영국 교수의 LOVETOOTH] 사랑니에 대한 고정관념 뽑아라

- 박영국 (치의72/ 28회) / 경희대치대병원 교수·교정과 -

“어쩌면 ‘사랑니’는 ‘잠 자느라 어젯밤에 내린 비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유리창의 물방울 같은 영화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개봉된 ‘사랑니’라는 영화의 평론이다. 사랑니 때문에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니는 무심히 지나치는 많은 치아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부분 사랑니에 대한 기억은 첫사랑 연인처럼 아리고 고통스럽다.

모든 사람이 어금니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음식물을 잘게 갈아 영양을 쉽게 섭취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어금니는 보통 6년 간격으로 나온다. 만 6세에 생기는 첫 번째 어금니는 나머지 치아가 나오며 배열하는 기준이 된다. 다음 12세 때 솟아오르는 두 번째 어금니는 치열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18세 이후에 나타나는 마지막 어금니인 ‘사랑니’다.

치아는 평평하게 생긴 앞니 2개, 뾰족한 송곳니와 작은 어금니 2개, 어금니 3개가 서로 다른 유전적 영역에 속해 있다. 생김새와 기능·강도가 서로 다르다. 일반적으로 치아는 같은 영역에서 뒤쪽에 놓일수록 기형적이고, 선천적으로 결손 빈도가 높다. 사랑니 또한 인류의 약 11%에서 선천적으로 나오지 않으며, 이런 점에서 퇴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고 본다. 특히 사랑니는 음식물 분쇄 능력을 의미하는 ‘저작 효율’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랑니를 꼭 뽑아야 할까.

사랑니의 운명은 식생활의 변천에서 비롯됐다. 인류의 조상은 거친 음식물을 섭취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치아 사이가 빠르게 마모됐다. 그러다 보니 성년에 이르렀을 때 먼저 나온 치아의 크기가 줄어 맨 나중에 나오는 사랑니가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저작 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부드러운 음식으로 식생활이 바뀌면서 치아 환경도 변화를 맞게 된다. 치아가 쉽게 마모되지 않으니 치아 공간이 충분치 않아 뒤에 나오는 사랑니는 대부분 잇몸뼈 속에 누운 채 파묻혀 버린다. 그러다 보니 사랑니 주변엔 염증이 생기기 다반사이고, 목에 염증이 자주 발생해 감기로 오인된다. 입냄새는 물론 앞에 있는 치아를 압박해 신경 통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인접한 치아 사이에 음식물이 끼어 충치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니는 명백히 불필요한 제거의 대상이다.

이번엔 사랑니의 긍정적인 면을 보자. 사랑니는 두 번째 어금니 뒤에서 가지런히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칫솔이 잘 닿지 않아 충치가 생길 우려가 높지만 기능적으로는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사랑니는 반드시 치료해 고이 간직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앞의 어금니가 상했을 때 대체치로 사용할 수 있고, 의치를 해야 할 경우 좋은 지대치로 이용한다.

간혹 사랑니가 날 때쯤 가지런했던 앞니가 겹쳐지면서 불규칙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교합은 사랑니 탓이 아니다. 노년에 첫사랑이 그립듯 사랑니도 무조건 뽑다 보면 나이 들어 후회할 수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 2008-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