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배 - 아이핀으로 해결될까


동문기고 민경배 - 아이핀으로 해결될까

작성일 2008-05-09

[시론]아이핀으로 해결될까

- 민경배 /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NGO학과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나무라지만 그나마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쳐 놨다면 최악만은 면한 셈이다. 그보다 더 난감한 경우가 외양간 고친다고 설레발치다가 결국 제대로 고치지도 못하고 엉뚱한 짓만 하다가 끝났을 때다. 옥션, 하나로텔레콤 등 최근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는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딱 그 모양이다. 이쯤되면 소 몇 마리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가히 온라인 국가재난 수준의 사태다.

 
 
정부도 나름대로 신속하게 개인정보보호 대책을 마련하면서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앞으로 포털 등 인터넷 사이트의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제한하고 대체수단으로 아이핀(I-PIN) 도입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아이핀이란 ‘인터넷 개인 식별 번호(Internet Personal Identification Number)’의 약자로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해 본인임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온라인 신원확인 번호를 말한다. 나이, 성별, 본적지 등 인적정보를 담고 있는 주민등록번호와 달리 아이핀은 단순한 13자리 난수로 구성되어 있고, 변경 및 폐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정보 보호에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발표가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일단 사용자들이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할 아이핀을 발급받으려면 신용정보회사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해야 한다는 난센스가 발생한다. 신용정보회사의 개인정보 관리는 과연 믿을 만한지, 만약 아이핀이 유출된다면 그 피해를 막을 방안은 있는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핀으로 가입한 회원이라 하더라도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또 다시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도 있다. 인터넷 쇼핑을 하려면 전자 상거래법 규정에 따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하며, 게시판에 댓글을 쓰려면 인터넷 실명제를 규정한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만 한다. 결국 사용자 입장에서는 제공하는 개인정보만 더 늘어날 뿐이니 오히려 불안감만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이번 조치로 국가가 주민등록번호에 관한 제반 권한을 아이핀을 발급하는 몇몇 민간업체에게 이관해주는 꼴이 된다는 점이다. 신용정보업체는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 아이핀 발급비용으로 수익을 취할 뿐 아니라, 사용자들이 아이핀을 통해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의 목록까지 취득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국가는 자신이 담당해야 할 개인정보보호의 책임을 신용정보업체에 이관하고, 그 대가로 업체에 독점적인 상업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거래가 오고가는 셈이다.

허술한 정보보안은 이번 사태의 2차적 원인에 불과하다. 1차적 원인은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해 과도한 개인정보가 곳곳에서 수집되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것을 합법적으로 보장해주고 있는 지금의 법제도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주민등록번호를 아이핀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한 개인정보 수집 자체를 근절시켜야 한다. 애초부터 외양간에 훔쳐갈 소가 없다면 도둑은 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경향신문 2008-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