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불공평한 세상, 위기의 사회


동문기고 목요칼럼-불공평한 세상, 위기의 사회

작성일 2007-09-29
불평등한 세상, 위기의 사회 
 안호원 news@pharmstoday.com 
 
최근 연일 신문 톱을 장식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변양균, 신정아, 정윤재 사건과 관련, 법원이 가족이 있고 또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검찰이 요청한 영장이 기각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회가 사람에 따라 차이와 차별이 있고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런데도 학교 교육을 잘 못 받은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정윤재, 변양균 전 청와대 비서관의 문제를 비롯해 주위를 둘러봐도 인간은 평등한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인간은 평등하다고 교육을 받았지만 얼마나 불공평하고 차별이 심한지 모른다.

일례로 전직 대통령 자식 둘이 죄를 짓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지만 사면 복권이 되어 금 빼지까지 다는 세상이다.

또 똑같은 폭력, 비리를 저질렀어도 힘있고 재력 있는 사람은 집행유예나 병보석으로 나와 거리를 활보하는데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생계형 범죄자는 죄질이 가벼워도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이 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든 차별화 된 사회다.

적어도 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얼마짜리 변호사를 선임하느냐에 따라, 몸값에 따라 이처럼 판결이 다르다.

또 신문에서 차지하는 기사 크기도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똑같은 사건이라도 가치에 차이를 두고 1면 톱이 되기도 하고 단신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허위 학위 논란으로 시작된 ‘변-신’의 사건이나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던 샘물교회 단기봉사단 사건의 경우가 그 한 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이 2건의 사건 기사는 한국 언론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크게 톱 자리를 장식하고 연일 신문 1면과 특집으로 다루어진 기사다. 몇 해 전 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뉴욕의 9.11테러나,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도 이처럼 연일 톱이나 특집으로 보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더구나 정부가 가지 말라는 나라에 봉사하러 갔다 인질로 잡힌 19명의 샘물교회 신도들은 억류 50여 일만에 한국 정보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 석방 협상을 하고 인질을 구출하면서도 가족 생계를 위해 아프리카 소말리아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간 어부 4명이 근 120여일을 인질로 잡혀있는데도 정부와 언론, 심지어는 국민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추석이 지나도 가족들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피랍가족들만 애태우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고 한국에 가족들이 있을 진데 신분에 따라 정부로부터 받는 관심은 이처럼 하늘과 땅 차이다.

또 재해로 인해 집이 유실되었으나 가옥대장이 있음에도 불구, 집터 흔적이 없으면 지원할 수 없다는 법적근거를 들어 1천여 만 원을 복구비로 지원하면서도 북한은 국민의 혈세로 모은 돈 수 십억 원을 복구비로 지원하는 나라다. 언제부터 우리가 법대로만 살았던가.

불공평한 게 또 있다. 국민의 3대 의무 중에 하나인 병역의무를 안 지키는 사람들을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인정, 대체복무를 시키겠다는 나라. 양쪽 심장이 붉다는 말인가. 엄청난 예산을 투입, 방송에 인기 연예인들의 별장이나 집을 소개하면서 다수의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잘 먹고 잘 잘살았다고 아직도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데도 방송마다 경쟁적으로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을 출연시켜 별난 요리시간을 갖는 사회. 문제는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방송의 막대한 광고료가 서민의 얄팍한 주머니에서 지출된다는 것이다.

또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똑같은 민원이 있어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심지어는 병원에 갈 때도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어떤 사람의 소개로 가느냐에 따라 대우도 달라진다.

본래의 취지보다 출연료가 70% 이상을 차지하며 연예인들만 돈 벌어주는 ‘000자선 디너 쇼’,나 제품의 품질 보다 인기 연예인을 상품으로 고객 유치하는 대출업계와 보험업계의 폭리로 피해자가 속출해도 방관하는 정부. 이것이야말로 차별된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가 어떠한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이는 불공평 한 처사다.

우리 사회는 지식인이 많은 세상이지만 원칙이 통하지 않는 가식의 사회, 지식이 죽은 어둠의 사회다. 설령 다른 사람이 사실이라 해도 자기 상식에 벗어나면 모두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버리는 불공평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아무리 잘못된 정책이라 해도 힘있는 사람을 인정하는 사회가 됐다.

말로는 인격, 평등, 평등 하지만 평등과 민주를 가장한 교묘한 방법으로 차별을 하며 편가르기를 자초하는 우리 사회다. 아무리 이해 하려해도 불공평한 세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디에서도 공공적 준거는 찾아 볼 수 없고 평등을 위장한 얄팍한 수법으로 썩은 지식인들이 정의를 내린다. 그래서 누구도 믿지 못하고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 불신에 세상이 되어버렸다.

‘남이야 어찌되던 나만 살면 된다.’ ‘남이 장에 가니 나도 덩달아 따라 간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쫓기듯 분주하게 뛰는 현대인들을 보면서 아프리카 남부의 칼리하리 사막에 사는 산양들이 생각난다.

스프링복(Springbok)으로 불리는 산양은 보통 20여 마리가 무리를 지어 풀을 뜯는데 때로는 수 만 마리가 모여 풀을 뜯기도 한다. 이때 산양들이 풀을 뜯다 몸이 부딪히면서 앞 쪽 양떼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고 뒤에 있던 양들이 덩달아 뛴다.

숨 가쁘게 질주하면서도 왜 뛰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른 채 달리다가 바다를 향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다 달았지만 뒤에서 달려오는 양들에 밀려 차례로 바다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맹렬히 달려오던 양떼들의 거친 숨결은 사라지고 죽음의 침묵만이 파도에 휩싸여 양들의 시체만 즐비하게 떠다니게 되는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아프리카 칼리하리 사막에 산양과 같은 운명을 지닌 것 같다.

왜 뛰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오직 앞만 향해 달리며 서로를 헐뜯고 비난을 하다가 어느덧 후회와 상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이제는 진실에 종도 울리지 않고 정의도 없는 슬픈 세상이 되어버렸다.

대선을 100여 일 남짓 남긴 시점에서 일부 대선 후보들이 전직 대통령을 찾아가 그의 이념을 계승하겠다고 읍소하며 지역 편가르기를 일삼는 것을 보면서 옛부터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당리당략에 의한 편가르기로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더니 그 못된 관습은 인간의 습성 상 고칠 수는 없는가 보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을 뽑는 것은 국민인데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말로는 아무리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목이 터져라 떠들어도 자기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건 국가의 커다란 불행이다.

대통령은 배우도 아니고 또 코미디언도 아닌데 자꾸 국민들을 웃기려고만 한다. 억지로 웃기려니 보는 사람들이 비위에 거슬리고 역겹기만 하다. 아무리 불공평한 세상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국민들은 친북 경향이 없고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고 안보에 철저한 지도자를 원한다. 평화체제도 좋지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지도자를 원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은 물론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불공평한 세상, 죽은 지식 사회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공평한 게 없을 정도의 암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생각할수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불공평이 이어지고 차별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불공평한 세상, 위기의 지식 사회에서 국민들이 과연 그들을 어떤 존재로 볼 지가 자못 궁금하다. 차이는 있으되 차별이 없는 밝은 세상을 이루는 지도자가 뽑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