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도정일-행복의 경제학
[도정일 칼럼]행복의 경제학
- 도정일 (영문61/ 13회) / 문학평론가 -
‘행복’만큼 주관적인 것도 없다. 사람마다 행복의 모양새가 다르고 색깔도 다르다. 가난한 섬마을 아이들은 개펄에 뒹굴며 놀아도 행복하고 비단옷 입은 제왕은 용상에 앉아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경우가 허다하다. 행복이라는 것이 학문 특히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여겨온 것은 행복의 이런 높은 주관성과 가치 연관성 때문이다. 과학은 검증과 측정과 체계화의 단단한 절차들을 요구한다. 이 사람에게는 행복인 것이 저 사람에게는 행복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행복을 측정할 객관적 기준을 뽑아낼 길은 막막해 보인다.
-富 증대해도 불행감 높아져-
그런데 요즘 사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이 행복 연구에 뛰어들고 있고 ‘행복학’이란 것을 새로운 학문 영역으로 올려세워 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행복 연구다. 이 분야의 개척자 가운데 하나인 리처드 이스터릴, ‘행복의 경제학’을 쓴 마크 아니엘스키는 모두 경제학 교수이다. ‘행복과 경제학’의 저자 브루노 프레이도 취리히 대학 경제학자다. 최근 불어로 번역되어 꽤 많은 독자를 얻었다는 ‘행복: 신학문의 교훈’의 저자 리처드 라야드는 런던 경제대학의 저명 교수다. ‘행복의 역설’을 쓴 그레그 이스터브룩도 경제학자이다.
경제학자들이 부쩍 행복 연구에 달려드는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행복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결정자를 대라면 사람들의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긍정적 의미에서건 부정적 의미에서건 돈, 소득, 부 같은 경제적 요소들이다.
실업, 고용 불안, 빈곤, 부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누가 뭐래도 단연 돈의 모습으로 오거나 적어도 ‘돈과 함께’ 온다. 사랑처럼 행복도 결코 ‘돈으로’ 혹은 ‘돈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자본보다도 물질자본 혹은 재정자본이 행복의 방정식을 좌우한다는 것도 사람들은 안다. 경제학자들이 행복 연구에 뛰어드는 것은 행복의 결정자 가운데 경제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행복의 경제학’을 말하는 경제학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부의 축적이 행복의 열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따르면 돈은 행복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인간자본, 사회자본, 자연자본, 환경자본, 재정자본) 중의 하나이다. 다른 요소들이 모자라거나 찌그러져 있을 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행복의 파랑새는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전 세계적으로 소득증대와 경제번영이 진행되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물질자본은 증가했으나 행복감은 증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역설의 골자다. 부가 증대하면 할수록 오히려 불행감은 더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경제학자도 있다.
-돈보다 민주적 자율성이 중요-
이런 역설은 왜 발생하는가? ‘행복과 경제학’의 저자 브루노 프레이의 진단은 “돈보다 민주주의가 행복에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삶에 적극 참여하고 공동체를 함께 일구고 운명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자율성’이다.
다른 경제학자들도 예외 없이 행복과 공동체, 행복과 민주적 시민사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에 언급한다. 진단이 이 경지에 이르면 행복의 문제는 경제학을 넘어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요즘 영향력이 대단한 하버드 정치학자 로버트 푸트남은 ‘웰빙’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적 덕목, 연결망, 공동체의 안전 같은 무형의 ‘사회자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이런 주장과 경제학자들의 진단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웰빙’을 말하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곱씹어볼 대목이다.
[[경향신문 2007-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