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곽재성-수도 통합’논란… 볼리비아도 뜨겁다
[Why] ‘수도 통합’논란… 볼리비아도 뜨겁다
보수파의원 중심‘행정수도’남부이전 추진
좌파 100만명‘이전반대’시위등 첨예 대립
- 곽재성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중남미지역학) -
20일 볼리비아의 라파스(La Paz)인근의 엘알토(El Alto)에서 100만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행정 수도(首都)를 남부 수크레(Sucre)로 옮기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7월21일 AP 보도〉)
지난 20일 충남 연기군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의 기공식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삽을 뜨는 광경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행정수도 분리 이전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었던 지난 대선 당시를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것이다.
같은 날,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볼리비아에서는 수도 분리가 아닌 수도 통합이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다. 볼리비아 의회 내 우파 정치세력이 수도를 통합하기 위해 현재 라파스가 담당하고 있는 행정 기능을 ‘헌법상 수도’인 남부 수크레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과 관련, 라파스에서는 100만 명의 인디오와 좌파 세력이 가두시위를 벌이며 우파의 수도 통합 주장 철회를 요구한 것이다. 볼리비아 역사상 가장 규모로 추정되는 시위였다. 과연 이들은 왜 거리로 나왔던 것일까?
수크레는 지난 1899년까지 볼리비아의 수도였다. 하지만 그 직후 볼리비아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입법·행정부가 라파스로 옮겨갔다. 그 뒤 라파스는 어느 새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상의 수도로 정해졌다. 지금도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이며, 사법부도 수크레에 있다. 겉으로 보면 이원화돼 있는 수도를 하나로 합치려는 ‘당연한’ 시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볼리비아의 복잡한 역사와 뿌리깊은 지역 감정이 숨겨져 있다.
라파스에서 남동쪽으로 420㎞쯤 떨어진 수크레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 시절부터 주변의 광산에서 채굴한 은의 집결지로서 포토시(Potosi)와 함께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은이 고갈되고 서부의 주석광산이 번창하자 경제의 축은 라파스로 넘어갔다. 물론 지금은 남쪽의 천연가스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면서 경제의 중심이 남부쪽으로 옮겨갔고, 라파스는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다.
라파스와 수크레, 두 도시는 문화부터 다르다. 서부를 대표하는 라파스는 고원(해발 3600m)에 위치하며 저소득 인디오 인구가 대부분이다. 남부의 수크레(해발 2830m)는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이 주민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민 소득도 상대적으로 높다. 라파스가 좌파운동의 산실이라면, 수크레는 가톨릭 교단이 이끄는 보수 세력의 중심이다.
볼리비아 의회에서는 그동안 보수적인 남부 추키사카(Chuquisaca)주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수도 이전 주장이 제기돼 왔다. 산타크루스(Santa Cruz), 타리하(Tarija), 베니(Beni), 판도(Pando)주 등이 지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라파스에서 행정 기능을 빼오려고 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수도 이전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표면적으로는 국토의 서쪽 끝에 위치한 라파스보다 중앙의 약간 남쪽 지역에 위치한 수크레가 수도로서 적절하다는 점이다.
둘째, 정치적으로 남부의 보수파 입장에서는 좌파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을 저지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주는 대부분 현 정권의 국정 운영 방식에 반대하고 있다.
셋째, 돈 문제다. 볼리비아의 1인당 GDP는 구매력을 기준으로 해도 3000달러인 남미의 최빈국이다. 이런 볼리비아가 앞으로 기댈 곳은 남미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천연가스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천연가스는 수크레에서 멀지 않은 산타크루즈 주를 비롯한 남부에 주로 매장되어 있다. 산타크루즈는 천연가스로 발생하는 세금 수입을 독점하겠다는 속셈으로 오래 전부터 자치권을 주장해 왔다. 수도 기능을 수크레로 옮겨오면 현 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고, 결국 자치권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모랄레스 대통령은 “라파스는 앞으로도 볼리비아의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수도 이전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통령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수도 통합의 실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라파스의 인구가 170만 명에 달하는 반면, 수크레는 25만 명에 불과하다. 통합 수도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며, 수도 이전에 예상되는 100억 달러의 비용을 조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수크레를 발판으로 천연가스의 이익을 남부가 독점하려는 시도를 북부와 대다수 인디오 인구가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경제적인 이유말고도 볼리비아 인들에게 라파스가 수도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산소가 희박한 해발 3600m 고지대에 위치한 라파스는 축구 강호를 자처하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주변국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자국 축구대표팀이 세계 최강팀들을 불러다가 마음대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볼리비아인들에겐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유혹이다. 상대 선수들에게 ‘숨 쉬기도 힘든’ 부담을 주기엔 해발 2830m의 수크레는 아무래도 2% 부족하다.
[[조선일보 2007-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