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원-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


동문기고 최혜원-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

작성일 2007-07-04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하다
[명화로 보는 논술] 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

- 최혜원 /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경희대 강사 -

마네를 통해 새로이 전개된 비극적인 사건의 폭로

파리 만국박람회가 한창이던 1867년 7월 1일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1276~ 1918년까지의 오스트리아왕가)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조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Joseph Ferdinand Maximilian, 1832~1867)왕자가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멕시코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다. 막시밀리안은 멕시코를 점령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야심에 불타있었던 나폴레옹 3세와 자유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멕시코 보수파의 추대로 1864년 4월에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올랐다.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은 이에 반대하여 무력저항으로 맞섰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을 구출하지 않았기에 프랑스군의 철수로 고립된 막시밀리안과 그의 측근들은 과격한 멕시코 독립군들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 처음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지는 7월 8일자 신문에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이런 나폴레옹 3세의 처사에 불만을 가지고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폭로하기 위해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그렸다. 막시밀리안이 멕시코 독립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는 장면을 그렸는데 구성면에서 상당부분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 산에서의 처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쪽에,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쪽에 그려 넣었다. 또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다. 다만 앞선 고야의 그림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데 반해 마네의 그림은 마치 냉소적으로 보일 만큼 차가워 보이면서도 사실주의에 더욱 가까운 그림으로 그렸다. 고야는 군인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을 막 쏘아서 총구에서 화약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조금 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야의 그림에서 보이듯 얼굴을 감싸며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고 총구가 바로 가슴 앞에 있을 만큼 군인들과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게다가 한쪽에서 자신의 발포차례를 기다리면서 장전하고 있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더 이상 살인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그림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들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군인들에게 처형당했는데 그림 속의 군인들은 이상하게도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다. 마네는 또한 그림에 그림을 완성한 날짜 대신에 막시밀리안의 처형날짜를 적어 넣음으로써 강하게 이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이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 후 1868년에서 69년까지의 기간 동안 유화와 석판화로 총 5개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그중 마지막에 가장 크게 그려진 최고의 작품이다. 마네는 이 그림을 이듬해 살롱전에는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 그림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조선일보 2007-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