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원-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동문기고 최혜원-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작성일 2007-06-27

강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명화로 보는 논술-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 최혜원 /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경희대 강사 -

통념상 연약한 여자가 건장한 남자를 힘으로 완전히 제압하고 칼로 목을 베고 있는 섬뜩한 살인의 현장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건장하고 담력이 꽤 있어 보이는 남자 아닐까? 아니다.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였던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가 그렸다.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운 그녀는 열아홉 살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고소하였는데 이 최초의 성폭행 소송사건으로 로마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 1년여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그녀는 남성의 권위주의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분노를 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 판 논개! 미인계를 이용해 적장의 목을 베는 유디트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원래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도성 베툴리아를 포위하여 이스라엘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도성 안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 ‘유디트’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절체절명의 조국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하녀와 함께 적의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항복한 척 이스라엘을 쉽게 항복시킬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와 단둘이 남게 된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벤 후 자루에 담아 하녀와 함께 도성으로 돌아와 성벽에 매달았다. 다음날 그 장면을 본 아시리아 군대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쳐 베툴리아는 해방될 수 있었다. 미모와 지혜로 조국과 민족을 구한 영웅인 유디트의 이야기는 서양미술사 속에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폭력과 자만에 대한 정의와 소박함의 승리, 남자에 대한 여성의 승리 등의 의미로 많이 다루어졌다. 많은 남성 화가들은 이 매력적 영웅 유디트를 기품 있고 우아한 성녀의 이미지나 살인을 하기에는 너무 연약해 보이는 여인의 이미지로, 때로는 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이르는 ‘팜므 파탈’의 요부이미지로 그려왔다.

남성의 권위주의에 대한 분노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다르다. 젠틸레스키는 이전의 두려움과 망설임을 지닌 여성적 이미지의 유디트가 아닌,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적장의 목을 치는 유디트의 모습을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으로 묘사했다. 왼손으로는 침대 위에 누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누르고 오른손에 든 긴 칼로 목을 베어 사방으로 튀는 피까지 생생하게 묘사해 강렬하고도 섬뜩한 인상을 준다.

너무나 과격한 유디트의 그림이었기에 당시에도 충격이 컸다고 한다. 게다가 적장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의 얼굴로 그려 넣어서 젠틸레스키의 분노를 표출하였다. 젠틸레스키는 최초의 여류화가로서 여성의 아름다운 미를 강조하기보다는 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강인함이 나타나는 강렬한 그림을 우리에게 남겼다. 우리는 그녀의 개인적 분노의 기록인 이 그림속의 유디트에서 그녀의 강인함과 단호함을 볼 수 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라고 했던가, “강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가 더 어울릴 듯하다.

[조선일보 200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