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노동일-사법개혁 법안의 명암
[fn시론] 사법개혁 법안의 명암
- 노동일 (법과77/ 29회) / 경희대 법대 교수 -
최근 사법개혁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는 우리나라 근대 형사사법 제도 도입 이래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 재정신청제도의 전면 확대 등이 부를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가장 큰 의미는 국민주권과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헌법 이념이 더욱 철저히 구현된다는 점이다. 시민의 참여를 통한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 확보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관심은 오랜 논란 끝에 도입된 배심원 재판이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한적이지만 일반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하게 된다. 재판은 직업 법관이 한다는 통념을 깨고 일반시민이 상식에 입각해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절차다.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런어웨이 주어리(Runaway Jury)’ 등 외국(주로 미국)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개정도 획기적이다.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법원에 불복할 수 있는 재정신청 대상이 모든 고소사건으로 확대되고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모든 피의자에게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원칙으로 변호인이 조사와 신문 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법정 구조도 피고인이 변호사와 나란히 앉아 검사와 마주보는 방식으로 바뀐다. 피고인이 단순히 ‘재판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명실상부 ‘대등한 당사자’의 지위가 되는 것이다.
그간 수사와 재판 과정은 국민에게 권위주의적으로 비쳐온 게 사실이다. 인권보호 차원에서 아직 미흡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내년 1월부터는 사법절차가 그야말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변화는 단순히 겉모습에만 그치지 않는다. 국민이 적극적으로 사법절차에 참여함으로써 법 교육을 통한 건전한 민주시민 양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다. 배심원의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돼야 하는 배심재판이 연고주의에 영향을 받는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배심원으로서의 의무를 준수하는 시민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된다. 토론 문화가 척박한 가운데 말솜씨 좋은 배심원이 주도하는 평결은 요식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국민의 재판’이라는 대의 앞에 사소한 걱정도 팔자라고 일축할 수는 없는 우려들이다.
재정신청 대상의 전면 확대는 검찰의 기소독점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려가 크다. 이웃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가히 ‘동방고소지국’이라 할 만하다. 2005년 고소를 당한 사람이 59만739명으로 고소 사건 수가 인구비로 따져 일본의 155배다. 반면 기소율은 20% 남짓이다. 검찰에 항고, 재항고를 거듭하는 사건 가운데는 민사상 사안을 형사고소로 해결하려는 경우도 많다. ‘삼세판’이라는 말에서 보듯 우리 문화는 쉽게 승복하지 않는다. 고소에 이은 재정신청 사건의 폭주와 법원의 부담 증가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의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운용이다. 배심제는 5년의 시범실시 기간 우리 현실에 맞게 세부사항을 다듬어야 한다. 또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달라진 환경에 적합한 수사방식과 재판 기법 등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법원이 공소제기 명령을 내린 사건에 대해 검찰이 기소와 공소유지를 맡도록 한 것이나, 공소제기 명령과 추후 판결을 내리는 주체가 같은 법원이라는 점이 체계상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배심제, 재정신청 확대, 수사과정의 변호인 참여, 공판중심주의 도입 등은 사법 비용의 엄청난 증가를 의미한다. 법원·검찰·경찰의 획기적인 인적·물적 확충이 따르지 않으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다. 사회 비용의 증가도 만만치 않다.
사법 개혁이라는 명제 앞에 돈 문제는 대의명분에서 밀리는 얘기다. 누구도 비용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이 이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남쪽의 귤이 북쪽에서는 탱자가 된다지 않는가. 장밋빛 환상 속에 도입한 숱한 제도들이 왜곡돼버린 경험을 사법 개혁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파이넨셜뉴스 2007-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