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안-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동문기고 박기안-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작성일 2007-06-05

[경영에세이] 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박기안 / 경희대 경영대학원장 -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고급문화에 대한 수요도 보편화되면서, 구미 선진국의 예술작품들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세계적인 예술작품들이 서울에서 전시되거나 공연되는 횟수가 빈번하다보니 근대 조각의 시조라는 로댕의 작품만 하더라도 벌써 두어 번이나 서울에서 전시됐다.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옥의 문’ 등 잘 알려진 작품보다는 ‘칼레의 시민들’이란 작품이 더 인상 깊다.

카이저의 희곡에서도 다뤄진 ‘칼레의 시민들’의 주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와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초기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가 칼레시를 점령했을 때 항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을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라는 사람이 먼저 죽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서로 죽기 싫어 제비를 뽑는다든지 희생자를 지명하는 것은 도시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비록 패했지만 적 앞에 당당하게, 그리고 후손 앞에떳떳하게 나섬으로써 도시의 정신과 민족의 혼(魂)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결단에 자극 받은 여섯 명의 다른 시민이 차례로 희생을 자원했다.

그 도시의 핵심 인물이며 절정의 삶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들의 용기와 헌신으로 칼레시는 그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칼레시민의 정신은 지도층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다.

특히 기업 활동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의 호감도가 달라지는 현실에서 보면, ‘칼레의 시민’이고자 하는 기업인 개개인의 노력만이 시장 경제가 신용의 장을 넓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이 미래 수익원을 확보하는 데 여러 가지 애로를 겪고 있다고 한다.

기업의 활력을 회복하고 중장기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신규 사업 활성화가 매우 중요한 데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다고 한다.

그런 반면에 대기업들이 재래시장이나 영세 상인이 밀집하고 있는 지역에 대형 유통업체를 신설함으로써 오히려 그 지역 영세 상인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납품업체에 대한 대형 유통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잘못된 입지 선정으로 인근지역의 영세 상인이 도산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민 경제가 살아나서 내수 시장이 뒷받침돼야 대기업도 국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유통의 현대화나 부동산 투자 이익도 기업이 추구하는 목적에 합당한 일이겠지만, 대기업은 나름대로 그 규모나 성격에 어울리는 사업을 확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의 창달에 큰 노력을 경주해야 하므로, 기업의 순기능적 역할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영세 상인의 생계를 위협하면서까지 대형 유통업체를 마구잡이로 증설하는 일부 기업 때문에 다른 기업들도 덩달아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한눈을 팔게 되면 이러한 타성(惰性)은 결국 시장경제의 질서를 해치고 기업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시장경제의 창달에는 기업에 대한 신뢰와 기업의 성실성이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종종 이를 등한시하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시장경제의 정착은 경제적 약자를 위해 기업의 공리(功利)를 양보하는 성실성이 없이는 공염불이 될 것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오해와불신이 사회 통념이 되다시피 한 우리 사회 속에 시장경제의 이념을 제대로 정착시키고자 한다면 경제적 약자에 대한 더 큰 배려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자기 희생의 마음가짐을 기업 경영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매경이코노미 2007-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