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지옥을 만든 자를 기리는 야만


동문기고 도정일-지옥을 만든 자를 기리는 야만

작성일 2007-05-28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지옥을 만든 자를 기리는 야만
 
- 도정일(영문61/13회) /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오늘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1945년 아우슈비츠 유태인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아 20세기 증언문학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남긴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첫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원작 제목은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봄을 목 빠지게 기다려야 하고, 봄에 도달하는 것만을 삶의 절절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삶이 최소한 정상성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봄’의 상징적 의미는 깊고 큰 것이지만 프리모 레비가 기다리던 봄은 그런 의미의 봄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봄, 사람이 얼어 죽지 않아도 되는 온기 그 자체, 추위라는 이름의 ‘적’이 물러가는 계절이다. 레비는 쓰고 있다. “두 달 후, 한 달 후, 추위가 휴전을 선포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이 진술은 야만 상태에 관한 보고서, 더 정확히는 ‘지옥의 보고서’다.
20세기는 13세기 시인 단테가 <신곡>에 그려 넣었던 ‘지옥’을 정확히 이 지상에 현실로 구현했던 시대다. 히틀러 집단이 만든 절멸수용소들이 그런 지옥이고 솔제니찐이 ‘아키펠라고’라고 부른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들이 또 그런 지옥이다. 구원의 희망이 없는 곳, 거기가 지옥이다. 단테가 그린 ‘지옥’의 입구 팻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릴진저.” 단테의 9층 지옥은 ‘죄 지은 자’들이 형벌을 받는 곳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지옥에 빠져 익사한 자들은 무슨 죄로 그 희망 없는 형벌의 땅에 유배되었는가? 단테의 지옥과 20세기의 지옥들을 갈라놓는 차이는 이것이다. 여기서 지옥에 관한 의미론의 질서는 반전된다. 20세기의 신곡에서는 지옥에 갇힌 자들이 죄인이 아니다. 죄는 지옥을 만든 자들의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본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의 지옥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정지해야 하는 곳, 인간이 인간이기를 잊고 가장 낮은 짐승의 수준으로 추락해야 하는 야만의 장소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망각하고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면,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면, 그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그러므로 이 망각의 조건과 맞서기 위해 레비가 선택한 것은 반대 전략, 곧 ‘기억하기’이다. 망각을 강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는, 마치 키르케의 마술에 맞설 때의 오딧세우스처럼,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다. 역설적이게도 단테의 시편들은 기억을 위한 레비의 이 투쟁에 큰 힘이 되어준다. 그는 대학시절에 읽었던,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그림자로만 남아있는 <신곡>, 특히 ‘지옥편’의 언어들을 흐린 기억의 창고에서 되살려내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나는 짐승으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구절을 기억해내고 “나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같은 구절들을 기억해내어 암송한다.

히틀러의 아우슈비츠나 일본 제국주의의 죄는
인간이 인간임을 정지하게 하는 지옥을 만든 것
만행 얼룩진 ‘과거와의 단절’이란 자신을 위한 단절
그 과거를 버리지 않는 건 곧 재생하는 행위다

레비가 지옥의 조건에서 기억해낸 이런 구절들은 우리가 히틀러의 만행이니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니를 말할 때 그 ‘만행’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보는 데 아주 요긴하다. 만행이라는 말이 대체로 의미하는 것은 살육, 파괴, 폭력이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지층에서 우리가 정확히 드러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행위의 야만성, “나는 나를 떠났다”라고 말해야 하는 조건의 야만성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온 문명들은 우리가 언제나, 반드시, 박수쳐주어야 하는 예찬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레비 같은 사람들이 지옥 속에서도 문명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은 것은 문명의 여러 체계들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우리는 사람이다”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인간적 품위의 수호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품위와 기억의 장치들을 포기한 것이 야만이고 만행이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대고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할 때 그 ‘과거’는 일본의 모든 과거가 아니라 ‘야만으로서의 과거’다.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기억의 권리는 야만의 과거까지도 끌어안고 기릴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고 수치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전체주의적 야만의 체계였다면 일본 군국주의도 야만의 체계다. 이 야만의 체계는 이웃나라 국민들만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다. 침략전쟁에서 죽어간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도 야만의 체계에 동원되어 그 체계의 야만성과 무의미성에 어떤 항의도 제기하지 못한 채 명령에 따라 속절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희생자들이다. 그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과 그들을 지옥의 전장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기억하는 일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지옥에 빠진 자와 지옥을 만든 자는 다르다. 그런데 일본 우익과 일본 정부는 이 혼동할 수 없는 것들을 혼동하고 ‘지옥을 만든 자’들까지도 열심히 기리고자 한다. 과거와의 단절은 바로 일본인 자신을 위한 단절이라는 것을 지금의 일본 정부는 알아야 한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저술 <익사한 자들과 구조된 자들>에는 야만의 체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등지에 건설한 지옥은 그 지옥을 만든 자들의 야만의 체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그 체계를 빼다 박은 모방이라는 통찰이 그것이다. 야만의 체계는 다른 모든 체계들도 그 자신처럼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그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므로 나치가 만든 수용소 지옥은 다름 아닌 나치라는 이름의 지옥의 체계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고 레비는 생각한다. 야만의 권력은 야만을 좋아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것을 깨고 두들겨 패고 부수어 낮고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통찰은 ‘만행’이라는 것의 의미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깨침의 한 순간을 제공한다. 화학자로 출발해서 작가가 되고 깊은 인문학적 진실에 도달한 레비의 이 같은 통찰을 우리는 지금의 일본 정부와 일본 우익에도 아시아인의 ‘우정 어린 선물’로 전달하고 싶다. 야만의 과거를 버리지 않는 것은 그 과거를 재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본에만? 아니다. 이른바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를 놓고 국내 우익과 일부 정치 세력이 벌여온 발목잡기, 트집, 반발 등은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청산해야 하는지, 과거사 청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극히 둔감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것은 과거 한 때 국가 권력이 저지른 인간파괴이다. 권력이 국민들에게 지옥의 체계를 강요했다면 그 체계를 청산하는 것은 보복행위가 아니라 나라가 품위와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다. 군사정권 시절 최루탄 연기 자욱한 대학 구내에서 쓰러져 땅바닥을 기던 어떤 노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부축을 받고 일어나면서 그가 한 말: “에고, 모두 짐승처럼 사는 거지요, 뭐.” 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것이 대학만인가? “나는 짐승이 아니다,” “나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 아직도 이렇게 힘겨워야 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한겨레 2007-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