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라 미국인이 주는 교훈


동문기고 큰 나라 미국인이 주는 교훈

작성일 2007-04-27
<안호원의 목요칼럼>
큰 나라 미국인의 교훈
"용서는 살아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안호원 news@pharmstoday.com 

 
33명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최악의 총기사건이자 9.11 테러 이후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전 세계인을 경악케 했던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버지니아 공대가 정상 수업으로 들어갔다.

미국 시민들은 NBC에서 방영된 동영상을 통해 거친 욕설과 저주, 적개심이 가득찬 분노의 표현, 섬뜩한 조승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이번 범죄가 조승희 개인적 부적응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지, 국가나 인종이 개입된 범죄가 아니라며 따라서 한인 전체와는 무관하고 인종적 편견이나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또 누구하나 대학총장이나 경찰 책임자의 경질을 요구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희생자 가족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조용히 삭히며 조사가 끝나고 시신을 넘겨 받으면 개별적으로 고향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할 정도다.

특히 승희 역시 가해자이자 희생자로 보면서 오히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대학 잔디밭에 놓은 추모석 33개, 이 중에는 조승희를 위한 것도 있다. 그 추모석 앞에도 꽃과 촛불이 켜졌고 편지도 쌓였다.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조승희의 절망적 자폐를 안타까워하며 영혼의 안식을 기원했다. 광란의 살인극을 저지른 이에게까지 이해와 관용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런 흉악범을 추모할 수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거나 편지를 찢고 추모석을 훼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용서와 포용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거창한 합동분향소를 설치하지도 않았고, 단지 사망자를 상징하는 돌 33개와 '사랑해' '잊지 않을거야' '넌 참 좋은 친구였어'와 같은 추모의 글을 적는 나무판이 설치됐을 뿐이다.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민족주의로 동양적 연대정서가 강한 한국인인 우리는 서구적 논리를 넘어 미안해하고 가슴아파하며 조문사절단까지 보내려 했을 때도 다민족, 다인종 국가인 미국인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오히려 한국인의 이런 걱정을 위로했다.

한국정부와 대다수 한국인은 그를 한국인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우려했지만 미국인은 달랐다. 미국정부와 미국인 다수는 그를 미국인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한국식 표기를 한 '조승희'를, 미국식 이름인 '승희 조'로 바꾸기까지 할 정도이다.

미국인은 조승희를 한국인으로 규정하여 인종주의라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게 될 경우 세계 각지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구성된 미국이 대립과 증오의 늪에서 허덕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미국정부와 언론은 이 만행을 개인적 범죄와 총기규제라는 사회적 규약의 문제로 접근하는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참담하고 아픈 상처를 아우르는 희생자 가족들과 미국민의 의식, 그리고 미국 언론의 보도자세에서 적잖은 교훈을 얻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낯뜨거워지며 꺼림칙한 게 있다.

2002년 미선, 효순이 사건 때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해 6월13일 경기도 양주에서 훈련 중이던 미군 2사단 장갑차에 치여 여중 2학년생 미선, 효순이가 숨졌다. 그 당시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분명 과실치사임에도 불구하고 수백개의 시민단체가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까지 하면서 "미군이 일부러 학생들을 깔아 죽였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무수히 퍼뜨렸고, 국민감정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반미 시위를 할 때마다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의 참혹한 모습의 사진을 뿌리면서 국민들을 자극시키곤 했다. 정작 규탄을 해야 할 서해교전으로 만행을 저지른 북한은 동족이라는 미명아래 정치인이나 시민단체들이 침묵하면서도 "불쌍한 우리 미선아, 효순아. 모이자 시청 앞으로" "미국놈들 몰아내고 자주권 회복하자"는 반미 구호를 외친 우리다.

몇몇 정치가들, 그리고 집단의 이익을 위한 농간에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우롱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민다.

국민들에게 반미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숨진 여중생들의 참혹한 모습의 사진을 마구 뿌린 시민단체 및 일부 전교조 집단, 정말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이 안타까웠다면 죽은 이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런 행위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은 학생들을 이용, 이를 호기로 여기고 국민들을 호도한 일부 정치인들, 그리고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 국민들, 어느 집단, 어느 정치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들이 얻고자 했던 이득을 얼마나 취했는지 묻고 싶다.

또 최근에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을 때의 우리 모습은 어떠했는가? 생각할수록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겉으로는 FTA 개방이 살 길이라고 떠들면서도 속으로는 민족주의라는 마음의 장벽을 높이 쌓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다 보니 좁은 땅덩어리에서 '민족 자폐증'에 걸려 있는 못된 정치인들이 분열만 조장시키는 꼴사나운 나라가 돼버렸다.

미국 같은 나라에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FTA 협정에 불만을 품고 반대를 하는 노동자도 있다. 또 한국, 한국인을 미워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33명의 죽음에 대해 '죽음 이외의 것'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이를 이용해 경거망동한 행동을 취하는 정치인이나 집단은 없다.

커다란 나라, 미국사회가 그 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중생이든, 버지니아공대 대학생들이든,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국군이든 인종, 국적,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인간의 삶은 존엄하다.

또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이들을 엄숙하고 숙연해지게 만든다. 이는 그 같은 죽음을 통해 산 자들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쩜 용서는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다.

마음으로나마 억울하게 당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