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이번 크리스마스엔 ‘러브 액츄얼리’를


동문기고 도정일-이번 크리스마스엔 ‘러브 액츄얼리’를

작성일 2007-04-26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이번 크리스마스엔 ‘러브 액츄얼리’를 

- 도정일(영문61/ 13회,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만남·화해·사랑이 여전히 중요하게 작동하는 성탄절은 이 시대의 사회통합 의식
불행히도 지금은 통합이 불가능한 시대이지만 영화처럼 ‘연결의 축제’가 되길 기대해본다
 

 
 
 
가장 길고 어둔 밤들이 세상을 장악하는 동지섣달에, 한 해의 끝에,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참 절묘한 시기 선택이다. 크리스마스에서 엿새가 지나면 새 해다. 한 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이 서로 인접거리에 있다. 그 인접거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만나 악수하는 화해의 시간대이기도 하다. 낡은 것과 새 것이 바통 터치로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서로 손 내미는 시점, 밤의 길이가 다시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하면서 긴 것의 끝이 짧은 것의 시작과 만나 화해하는 시간, 떠남과 도착이 한 정거장에서 조우하는 순간에 크리스마스가 있다. ‘성탄’의 깊은 은유적 의미도 ‘극과 극의 만남과 화해’에 있다. 가장 존귀한 자가 가장 비천한 곳으로 내려온다는 것이 ‘강림’의 의미다. 이 강림은 동시에 만남의 형식이다.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만나고 하늘과 땅, 정신과 육체, 성스러운 것과 비속한 것이 만나고 화해한다.
성탄절은 오늘날 종교적 축제보다는 세속적 대중축제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지만, 그 위력의 핵심부에는 만남, 화해, 사랑의 주제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대중문화론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대의 크리스마스는 단연 사회통합의 의식(ritual)이다. 근년의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의 이런 대중문화적 기능을 잘도 보여준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코메디 풍으로 그려내는데, 그 주제의 노림수는 단연 사회통합이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마스 정신’이 의미하는 것은 통합의 즐거운 단골 메뉴, 말하자면 사랑, 결혼, 화해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때의 사랑과 결합은 단순 코메디의 경우와는 달리 도저히 가능성 없어 보이는 사랑과 결합의 성취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를테면 독신의 미남 총리가 잘난 집안의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크리스마스 정신’에 맞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과 결합의 성취여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의 미남 총리는 총리실에 근무하는 말단의 뚱보 여직원과 사랑에 빠진다. 흑인 남자는 백인녀와 결혼한다. 한 영국 남자는 한때 자기 집 하녀였던 포르투갈 처녀를 찾아가 청혼하고, 어떤 인기 가수는 미녀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모두 마다하고 그를 위해 평생 봉사해준 못생긴 남자 음악조수를 찾아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 백인소년은 자기보다 상급학년인 유색인종의 여학생과 사랑의 가능성을 틔우고 입양아를 보살피며 사는 한 홀아비는 동네 과부와 사랑을 예약한다. 잠시 바람을 피웠던 남편은 크리스마스 날 자기가 왕바보였음을 고백하고 덕성스런 아내와 화해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원 ‘크리스마스 정신’으로 계급통합, 빈부통합, 미추통합, 신분통합, 인종통합, 젠더통합(?), 연령통합, 가족통합을 달성한다.

문제는 이런 영화의 사랑과 결합의 이야기, 그리고 통합의 주제가 극히 희극적이라는 점이다. 영화가 코메디 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만 희극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한참 멀어 보이는 통합의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정신’에 얹어 억지로 엮어내자면 싸구려 희극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화 ‘러브 액츄얼리’가 보여주는 것은 영국 사회의 통합의 가능성이나 통합을 향한 진지한 사회적 열정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그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불안이다. 통합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을 달성할 생각도, 방법도, 의지도 없는 사회일수록 대중문화형식을 빌어 열심히 통합의 필요성을 말하고 노래한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비참과 불행을 감추기 위해 “나는 행복합니다”를 연창하듯이.

통합과 화해의 기제로서의 크리스마스의 역사가 서양에서도 짧은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미 19세기 영국 사회를 향해 던져진 사회통합소설의 백미다. 비신자, 악덕고용주, 노랭이 수전노 스크루지에게 크리스마스는 돈과 시간의 순수한 낭비다. 그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 정반대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종교적 이유나 동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각성’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대의 대중문화적 주제 처리 방식과 그 효과에는 큰 차이가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경우는 인간관계에 대한 소설 주인물의 각성이 어떤 형태의 공동선과 공동체적 인간 통합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게 하는 반면,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지금은 통합의 시대가 아니라 통합이 불가능한 시대다. 통합의 가능성을 말하기에는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들이 제각각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고 공동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공에 휘발하고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 통합의 이름 아래 흔히 진행되어온 정치적 악행과 인간 희생이 너무도 커서 멍텅구리 천치가 아니고서는 통합이라는 말 자체를 들먹거리기가 극히 어려워져 있다. 사회통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것이랄 때 그 묶어주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지탱하게 할 공유의 가치와 연결의 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관계나 연결의 끈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에 최고로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이거나 국민소득이다. 국민소득 2만불에 이르고 3만불에 이르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망상이 공공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소득과 사회통합 사이에는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도 별 관계가 없다. 소득수준 높아지는 것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소득수준의 높이로 사회가 통합되고 사람들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저무는 해의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시 그리워지는 것은 사람이 자기 개인의 울타리를 너머 자기보다 더 큰 어떤 것과 만나고 그것과 자기를 이어붙이는 연결의 능력이다. 그런 연결의 축제일 때에만 크리스마스는 통합의 의식이 된다.

[한겨레 2006-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