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희망’의 은빛여우 찾아 나도 떠나볼까


동문기고 김 선-‘희망’의 은빛여우 찾아 나도 떠나볼까

작성일 2007-04-24

‘희망’의 은빛여우 찾아 나도 떠나볼까                         

- 김 선 (경희대 교육대학원) -
 
나는 이렇게 읽었다 /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한 소년을 만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둔 13살의 아이. 처음 경험한 몽정과 함께 사랑을 시작한 아이.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를 지닌 형과 아빠 사이에서 결국 집안의 기둥과 희망이란 역할을 감당해야할 아이. 가난의 대명사 청운연립의 호수도 없는 옥상 컨테이너 속에 살고 있는 아이. 상진이를 만났다.

상진이는 예전에 만났던 옥희(주요섭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처럼 한없이 순수하고 순박하며 천진난만하지도, 그렇다고 진희(은희경 <새의 선물>)처럼 영악하고 영특하며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저 딱 13살의 아이. 중학생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해 나가지만, 여전히 초등학생일 수밖에 없는,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13살의 아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진이와의 만남이 특별한 것은 상진이가 지닌 범상치 않은 능력 때문이다.

상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녔다. 이게 뭐 별거냐 싶다면 다시 조금만 눈을 돌려 주위의 13살 아이를 살펴보라. 집과 학교, 그리고 학원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공간을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상진이는 청운의 치읓만으로도 놀림의 대상이 되는 연립주택에, 호수도 부여받지 못하고 불법으로 옥상을 점령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상진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진이에게 자신의 집은 옥탑방이 아니라, 하늘과 가장 가까운 ‘하늘호’이며, 옥상은 넓은 마당이다. 마당 한가운데 노란색 물탱크는 고해성소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게다가 102호의 소연이를 사랑하고부터의 옥상은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가는, 또 그 사랑을 한없이 바라봐 주는 사랑의 실천소이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찾게 된 약수터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전인슈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안식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뿐만 아니다. 상진이는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긴 부정적인 공간, 샛별문고가 화재로 무너진 자리 위에 용감하게 서서, 아픔과 상처를 털어내듯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상진이라면 샛별문고 자리 위에 세워질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여자의 우악스러운 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떠올리더라도 다시 ‘샛별문고 자리 위 중국집’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고 희망을 찾아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우주가 최초의 폭발을 한 이래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이곳에 분화구가 생겼고 사람들은 그것이 분화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둘 모여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여우가 다녀간 것인지도.”(298)

그렇다면 상진이의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이 분화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나. 여우를 만난 것이 둘. 이곳이 분화구라는 생각은 트럭을 운전하고 싶은 욕구의 근원이 됨과 동시에 현재의 공간을 절대적으로 보지 않고, 언제든 새로워 질 수도 또 떠날 수도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여우를 만나면, 특히 여우가 뭐라 했는지 두고두고 생각한다면 의미부여, 희망찾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연히 작가와 나는 같은 공간을 살았고, 살고 있다. 서울여대 국문과의 토양은 무언가 되고 싶게 만드는 생명의 옥토이다. 그리고 뉴타운으로 시끌한 구파발 일대는 확실한 분화구이다. 이제 나도 상진이처럼 혹은 작가처럼 은빛 여우를 만날 때이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한겨레 2006-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