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백승현 - 제발 대북 미망에서 깨어나자
[시론] 제발 대북 미망에서 깨어나자
- 백승현 (정외72/ 24회, 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 -
북한 핵실험 이후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로 집중되고 있고, 주변 정세도 연일 긴박하게 펼쳐지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돼 ‘북한 제재위원회’가 곧 구성될 예정인 것을 보더라도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한 국제사회의 북핵에 대한 위기의식과 대처의지가 어떠한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처럼 설마했던 북한 핵실험이 현실로 나타났고 제2, 제3의 핵실험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국내에서는 특히 국정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 여당 일부 인사들이 여전히 북핵문제와 대북정책에 대해 궤변과 억지논리로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북한 핵실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있으니 국민적 공감대에서 무엇이 국론이고 대세인지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에선 “북한 핵실험은 미국 때문에 한 것이고, 대북 지원은 북한 핵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계속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 핵은 우리가 아닌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억지 논리로 북핵을 용인하려는 인사도 없지 않다.
모든 악한 행동은 비록 어떤 정황적 배경이 있건 간에 그 행위 주체에 직접 책임을 묻는 게 일반적 관행이다. 이런 점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윤리 도덕에서 가치관이 뒤바뀐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한반도 비핵화 약속을 어기고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미국 탓만 할 수 있는가. 또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통해 북으로 들어간 막대한 현금 외화가 핵실험 비용에 충당됐거나 적어도 핵실험을 수월케 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의심되는 일이다.
북한은 더욱이 김정일과 당·군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획일화된 전체주의 사회이다. 그런 북한에 2조3000억원의 막대한 외화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굳이 그 돈의 흐름이 명백히 추적되지 않더라도 김정일이나 당·군의 재량과 필요에 따라 역점사업에 쓰였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대북 지원 자금이 핵실험에 이용됐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대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논리적으로도 틀린 말이다. 오히려 북한과 같은 획일적 폐쇄사회에선 대북 지원 자금이 핵실험 자금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입증이 가능할 때에 한해 지원이 계속돼야 하는 게 타당한 논리이다. 미국 측 인사의 말대로 개성공단사업은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가 있는 만큼 북한 개혁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으나, 북한 사회 변화의 모멘텀으로 작용할 여지가 작은 금강산관광은 봉이 김선달식 돈벌이를 김정일에게 허용하는 형국이다. 북이 핵실험을 한 차제에, 아무리 민간사업이라도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한 대북 지원은 계속돼선 안 된다. 사실 우리 측만 민간사업이지 북한엔 ‘민간’이 없지 않은가. 현금 아닌 인도적 물자 지원으로, 또 검증 가능한 방법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직접 혜택이 가게 하는 것을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문제에서도 북한 선박 검색과정에서 총격전이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전쟁이 날 가능성이 크지 않으냐고 걱정하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대북 패배주의에 휩싸인 억지와 궤변일 뿐이다. 만일 한국의 PSI 참여 없이 타국군에 의한 검색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한다면 한반도는 과연 긴장 없이 평화를 구가할 수 있는가? 총격전이 두려우니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 논리대로라면 전쟁을 안 하고도 우리는 이미 북에 진 거나 다름없다. 전쟁 위협이 예상된다면 오히려 확실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궁극적인 전쟁 억지가 가능하다. 이제는 정말 대북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때다.
[세계일보 2006-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