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규-NLL 조정 지금은 때가 아니다


동문기고 김찬규-NLL 조정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작성일 2006-03-23

< NLL 조정 지금은 때가 아니다 >
 ---  김찬규 (경희대 명예교수·국제법) ---
 
지난 2일과 3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제3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열렸다. 2004년 6월 설악산에서 개최됐던 제2차 회담후 1년 6개월 만에 열린 이 회담에서 우리측이 남북 서해 해군부대 간 직통전화 설치,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의 안전통행을 위한 군사적 보장합의서 체결, 제2차 국방장관 회담개최 문제 등을 의제로 제안한 데 대해 북측이 서해상 충돌방지를 위한 ‘근원적 조치’를 먼저 합의해야 한다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재조정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써 회의는 서로 얼굴만 붉힌 채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생각건대,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이다. 마차는 말이 수레를 끄는 것이기에 수레 앞에 말이 와야 하며 말 앞에 수레가 와서는 안 되듯이 순서와 절차가 뒤바뀌면 일은 성사되지 않고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이번 일에서 우리측이 순서와 절차에 맞게 행동했음에 반해 북한의 행태는 말 앞에 수레를 갖다 놓은 격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통일을 최종 목표로 하는 남북관계는 휴전상태에서 긴장완화로, 긴장완화에서 평화정착으로 옮아감으로써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정도(正道)인데 북한의 행태는 평화정착 후에 해야 할 일을 긴장완화도 되지 않은 단계에서 하려 드니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1992년 9월17일 채택돼 당일 발효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2장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 합의서’에 있는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규정(제10조)을 근거로 당장 NLL의 재조정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듯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NLL과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법적 개념상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NLL이 휴전체제를 전제로 한 것임에 대해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휴전체제에서 평화정착 상태로 옮아간 후라야 거론할 수 있는 것이다.

1991년 12월13일 채택되어 92년 2월19일 발효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는 규정이 있다(제5조). 이것은 남북이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토록 공동노력해야 하며 평화상태가 실현될 때까지는 NLL이 포함된 현 군사정전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평화상태가 조성되기도 전에 NLL부터 조정하려 들었다니 이것은 정녕 사물의 순서와 절차를 도외시한, 다시 말해 수레를 말 앞에 갖다 놓으려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NLL의 재조정 등 충돌방지를 위한 ‘근원적 조치’를 먼저 합의해 나가면 이것이 쌓여 긴장완화의 효과를 가져오고 나아가 평화상태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본말을 전도한 생각이며 91년 12월13일 채택된 남북 합의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경계선은 성질상 긴장완화를 통해 평화정착이 되고 난 후 최종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란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화정착이 되기도 전에 NLL에 손대려 함은 긴장완화는 도외시하고 휴전체제를 뜯어고치려는 기도에 불과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 NLL은 휴전체제의 일부로 정착되어 있다. 이것이 1958년 8월 유엔사측의 일방적 행위에 의해 설정된 것임은 사실이지만 북한이 이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1973년 12월이었기에 20년간 계속된 북한의 묵종(默從)은 북한으로 하여금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세계일보 시론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