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현문우답
賢問愚答
겨울바람에 무수히 떨어진 낙엽이 거리를 덮고 있다. 그 계절은 그렇게 가고 온다. 자연의 이치? 왜 그럴까? 여름의 속성, 겨울의 속성이 본래 비어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가보다. 엊그제의 여름과 어제의 가을이 또 다르듯 말이다.
가을은 가고 이미 겨울이 찾아왔는데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푸르른 산천초목 여름을 계속 움켜쥐고 있으려고만 한다. 창 밖에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려 쌓여도 여름의 환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흔히 우리의 마음엔 두 개의 힘이 있다고 한다. 쥐는 힘과 펴는 힘이다. 그런데 세게 움켜쥐는 힘도, 활짝 펴는 힘도 모두 내 안에 있는 마음의 힘이란다. 어느 것도 다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둘 다 내 마음 안에 힘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사람들이 펴기보다는 움켜쥐기에 더 익숙해져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집착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고 있는 힌두교의 바라문을 보던 승려가 물었다. “왜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가?” 바라문이 대답하기를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요. 이 신성한 강물이 죄를 씻어 줄 테니까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해탈을 이루고자 함이오.” 그 말을 들은 승려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저 강물이 진정으로 죄를 씻어준다면 갠지스 강의 물고기는 모두 해탈을 하였겠소.”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는 건 종교적 형식이다.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근다고 정말 죄가 씻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 일까? 죄는 ‘몸 씻기’가 아니라 ‘마음 씻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했다 해도 어떤 마음을 갖고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각 종교에서 ‘집착을 놓아라’ ‘참회하라’ ‘회개하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때(죄)를 닦는 때 타올 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갠지스 강이나 낙동강이냐, 한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육신의 몸을 씻는가 아니면 영혼의 마음을 씻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세례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형식이다. 거기에도 ‘죄를 씻는다’ 죄 사함이라는 상징이 담겨있다.
예수도 세례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강에서 나왔을 때 ‘그 분께 하늘이 열렸다’ 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현문우답’은 ‘그 분께 하늘이 열렸다’는 대목에 있다. 2011년 전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에서 예수는 많은 무리들을 향해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렇다. 마음이 깨끗한 때 하늘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 “천국은 네 안에 있다” 고 기록 되어있다.
두 개의 힘처럼 안팎이 둘이 될 수는 없다. 천국이 내 안에 있을 때 천국은 내 밖에도 있다는 것이다. 천국이 내 안에 없으면 결국 내 밖에도 없다. 그래서 나의 고집, 나의 착각으로 범벅된 ‘나의 마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게 천국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갠지스 강 자체에서만 집착을 한다.
‘갠지스 강에서 몇 번이나 목욕을 했나?’ ‘출석하는 교회에서 몇 번이나 봉사를 했나’ ‘법당에서 몇 번이나 시주를 했나’를 따지며 형식에 불과한 수치와 횟수에만 매달려 아까운 시간만 소비한다. 이젠 우리가 물음을 바꿔야 할 때가 지난 것 같다. 종교의 강, 갠지스 강에서, 요단강에서 나는 몸을 씻고 있는지, 마음을 씻고 있는 지….
총선도 대선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위급하고 중요한 것은 무너져가는 공권력, 사회질서, 교권추락, 정치권의 도덕성 상실 등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투명해야 할 국회의사당 CCTV를 가지려는 몰지각한 야당의원, 신성해야 할 의사당 안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마치 애국지사나 된 것처럼 우쭐되는 어리석은 야당의원, 투표하지 못하게 부모를 여행 보낸다고 한 젊은이에게 ‘진짜 효도’라고 노인 폄하를 한 후레자식 같은 모 대학교수, 법도 무시되고 억지가 먹혀들고 비상식이 상식으로 된 망할 것 같은 세상처럼 막가파식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데도 어느 누구 하나 이를 지적하기는 커녕 무엇이 무서운지 방심만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찌하다 자기들 행위는 정당화하며 막무가내로 억지논리를 펼치고 자신들과 반대가 되면 무조건 국민들이 선택한 의원들에게 사표를 강요하고 의사당이 아닌 거리로 뛰쳐나오는 행위, 그런 자들을 모두가 방심만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같은 안타까움이 결국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쏟아진다.
이 시대의 아들과 딸인 이른바 203040세대의 분노는 자해와 시위만으로는 해소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고통과 상처를 입은 그 누군가,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자식일 수도 있는 이들의 더 처절한 고통을 목도 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상처가 아물게 될 운명인지도 모른다.
아, 정말이지 미쳐버릴 만큼 아픈 시대다. 너무 춥다.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문득 장애자녀를 둔 어머니가 장애자식에게 “좋은 마음으로 살자,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긴다.” 고 무언의 약속을 하고 20년을 기쁨 충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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