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최소한의 가치 있는 인생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최소한의 가치 있는 인생

작성일 2011-10-13
평소 우리는 햇볕이 내려 쬐는 밝은 낮에 깨어서 일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햇볕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루를 ‘빨리, 빨리’ 서두르면서 분주하게 산다. 그런 햇볕이 ‘최소한’ 우리에게 공급되지 못하면 그 최소한의 햇볕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최대한’을 무참하고 무의미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살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H2O)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최소한’의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 역시 큰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최대한’을 갈망하며 소원한다. 최대한의 능력, 최대한의 성공, 최대한의 보수, 최대한의 명예, 이 최대한의 가치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 할 ‘최소한’의 가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를 한다.

‘10’이라는 숫자가 이루어지기까지는 ‘1’이라는 숫자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최소한’의 가치를 무시하는데 그 최소한의 가치를 무시 할 경우 그 인생 역시 ‘최소한’의 가치조차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반드시 있어야 할 ‘최소한’의 가치란 무엇일까? 부드러운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 연민 어린 눈물 한 방울, 가뭄을 촉촉이 적시는 가랑비, 풀잎에 내려앉는 아침 이슬, 골방에서 순간에서 간구하는 짧은 기도, 최소한의 인격, 최소한의 예의, 최소한의 상식 등 이러한 것들은 흔히 말해서 ‘최소한’의 가치들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최소한’ 의 조각들이 때에 따라서는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최대한의 설교나 설법보다 더 감동적인 때도 많다. 이것이 바로 내세에서의 인생이다. 또 연민의 눈물 한 방울이 긴 말보다 더 진지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짧은 시간에 드린 기도가 최대한의 논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때도 많다. 이런 것들이 빠져버린 인생이라면 그야 말로 허무한 삶을 산 것이다.

고난의 먹구름에 쌓여 괴로워하다 문득 한 순간 고개를 들어 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최소한의 행복일수도 있지만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의 가장(家長)이 공사판에서 하루 종일 땀 흘려 받은 일당, 분명히 이것은 ‘최소한’이지만 가장으로서는 참으로 큰 최대한의 행복이며 소중한 재산이다. 또한 실패를 거듭하던 인생이 성취한 작은 성공 역시 가장 소중한 성공이다. ‘최소한’에서 ‘최대한’을 발견한 인생이 밝고 맑은 하늘을 얻고 햇볕의 소중함도 알게 되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장 후보 한 분이 ‘최소한’의 자유를 포기한 것 같은 상식이하의 발언을 해 그 분이 어느 쪽 땅에서 사는 분인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그 분이야말로 늘 햇볕 속에서 살다보니 햇볕의 소중함을 모르듯 자유를 맘껏 누리는 이 땅에서 살다보니 아무래도 최소한의 자유의 소중함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서울시장이라는 최대한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유’를 다른 쪽에 빼앗기려 한다. 자유인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한 나라의 시장(市長)을 어떻게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 철수, UN본부에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단체를 이끌어 온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 단체는 결국 국가 권위를 실추시키고 비웃음을 산 단체가 아니던가.

그런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과 또 그를 중심으로 한 정당 및 집단들에게 수도서울을 맡기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서울시장이 되려면 이념과 사상의 색깔, 국가관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생각할수록 끔찍하고 국운이 걱정된다. 월남 패망이 전체 인구 0.5%의 좌파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 때도 일부 지식인들, 학계, 젊은 대학생들이 좌익이념에 빠져 소수 좌파 정당들과 어우러져 반정부 시위를 벌린 결과 지금은 나라 이름마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가 그런 위기상황에서 국가안위를 위협받고 있는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경거망동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과거 햇볕 정책 덕분일까 지금은 ‘좌파’ 을 자처하는 부류들이 햇볕거리를 더 활보하고 있고 우파들이 오히려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최소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만큼은 유권자들이 국가 안위를 생각하며 신중을 기해 반드시 투표를 해 권리와 의무를 행사해야 한다.

무관심한 ‘최소한’의 내 한 표가 ‘최대한’의 나쁜 결과로 나라를 망치게 하고 후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에 대한 가치의 소중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발견하고 이 땅을 자유 함으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라면 더욱 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최소한의 구미(口味) 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길이 있다. 국가 안위를 생각하면서 ‘최소한’ 의 인생에 눈을 뜨는 우리가 되어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