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베풂의 삶


동문기고 안호원칼럼-베풂의 삶

작성일 2011-09-22
추석명절이 지난 며칠 후 시인이자 목사이기도 한 20년 지기(知己) 지우(知友)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우는 몇 달 전 모 신학대학원 총 동문회 행사에서 시(詩)를 낭송했는데 얼마 후 임원으로부터 자신이 낭송한 시를 갖고 문제를 제기하는 몇몇 목사들이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여자목사의 경우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는 말까지 전했다고 한다. 이어 그 지우는 자신이 시 낭송을 하면서 목회자(목사)들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관념적인 축시를 낭송한 것 밖에 없는데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그 지우는 또 이런 말을 꺼냈다. “아마 그 날 ‘자랑스러운 동문 상’을 몇몇 목사들이 300만원씩을 내고 받다보니 ‘부끄러운 상’ 인 것을 스스로 알고 그나마 양심에 가책은 되었나보다” 하면서 말을 한 임원에게 “그 시를 낭송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몇몇 분들이 시 내용이 참 좋다며 복사를 해달라고 한 분들도 있었는데, 헐뜯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문제가 있는 것처럼 평가를 하는 것은 매우 잘못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을 잘 알면서도 부끄러운 상을 받은 몇몇 사람의 말만 듣고 이해를 시키기보다는 맞장구를 쳤을 임원의 처세가 자신을 더욱 화가 치밀게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그 지우는 중견시인으로서 심사위원까지 지낸 분으로서 많은 행사에 초청을 받아 시 낭송을 하기도 한 유능한 분이시다.

그런 분의 옥고(玉稿)의 가치를 못 알아본 것은 그날 총회에 참석한 목사 중 일부 목사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된 것이다. 불쾌함을 지우지 못하는 지우에게 듣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준 문제인 것 같으니 서운함을 풀어버리자고 위로의 말을 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없겠는가. 내가 잘나가도, 못나가도 항상 질시하거나 질타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뿐이겠는가. 목사조직은 물론 어느 사회조직이나 기생충 같은 그런 부류는 있게 마련이다. 그게 사람 사는 곳이다. 바로 이럴 때 잘 헤아리는 지혜가 그 사람의 인품, 인생의 길을 결정하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심보는 다는 아니지만 남을 칭찬하는 것에는 아주 인색하면서도 남을 헐뜯고 흉을 보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다. 있는 말, 없는 말, 총동원해서 아주 신 바람나게 쏟아 낸다. 또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럴 때 그 치우쳐져 있는 것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슬기롭게 처리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요, 수련이며 자기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교육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그 모든 수단들이 자기에게 도전하는 적을 만들지 않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옛말에 백 명의 좋은 친구가 있는 것보다 한 명의 나쁜 친구가 더 무섭다고 했다. 즉 나를 좋게 보아주지만 침묵하는 백 명의 친구보다 나쁘게 보고 헐뜯는 단 한 사람이 나를 무참하게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임에는 분명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분하기도 하고 억울할 때도 많다. 그러나 이런 때라도 자신을 위해서는 엉킨 매듭을 반드시 그 날로 풀어야 한다. 그것이 얽히고 설켜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아 먼 훗날까지 아주 풀기 어려운 매듭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 제공자는 남이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크게 상처 받을 일도 없다. 부정적인 ‘그럴 수 있니?’ 보다 긍정적인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사고를 갖는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낮추는 겸손하고 우직한 사람, 베푸는 사람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또 상처도 없다.

인생, 정치, 사업에도 다 마찬가지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원인제공자인 ‘나’ 를 먼저 생각하고 모든 애착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허물과 약점들이 자신을 잠 못 들게 할 때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비판받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 수 없는 조직속의 자연인이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말도 안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판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을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서운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남의 좋은 것만을 보아주는 눈의 베풂, 늘 모두에게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의 베풂으로 살자.

그리고 사랑스러운 말소리가 입의 베풂으로, 자기를 한없이 낮춰 인사함이 몸의 베풂으로, 곱고 착한 씀씀이가 마음의 베풂으로 알고 그렇게 살자.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베풀 수 있는 마음에 여유를 감사하며 살자. 이것이 그 선(善)한 지우의 의지이자 마음이기도 하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