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배-인터넷은 ‘작두위의 무당’


동문기고 민경배-인터넷은 ‘작두위의 무당’

작성일 2006-04-12
[시론] 인터넷은 ‘작두위의 무당’
 
--- 민경배 (경희대사이버대교수·NGO학과) ---

개강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인터넷이란 어떤 것인지 간단히 표현해 보라”고 주문했다. 재치 있고 기발한 이야기들이 여러 개 나왔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인터넷은 작두 위에 서 있는 무당”이라는 답변이었다. “인터넷이란 잘만 쓰면 무당처럼 온갖 신통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칫 삐끗하면 시퍼런 작두날에 발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학생의 설명이다. 모든 학생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멋진 비유였다. 하지만 빠뜨린 것이 하나 있었다. 인터넷이란 작두날은 무당 본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사이버공간 인신공격에 얼룩-

네티즌 여론의 위력이 강해지면서 인터넷이란 작두날에 상처 입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2년 붉은악마와 촛불 시위로 우리 사회에 건강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던 네티즌 파워를 향한 기대와 환희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사이버 폭력에 대한 우려와 경계로 변질되었다. 지하철 개똥녀와 서울대 철사마 사건 등에서 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네티즌들의 인신공격과 여론재판에 사이버 공간은 점점 더 얼룩지고 있다.

최근 서울 모 중학교에서 벌어진 기간제 교사의 성폭행 사건을 두고 또다시 네티즌 여론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네티즌 여론은 비판의 차원을 넘어 집단적인 사이버 폭력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가해자의 프라이버시 정보가 노출됨은 물론 당시 회식 자리에 합석했던 동료 교사들의 평소 언행까지 덩달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또한 피해 여성이 법률적 조언을 받기 위해 대한법률구조공단 사이버 상담실에 올린 글까지 각색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 옮겨졌다. 이러다가 네티즌들의 불필요한 호기심 때문에 피해 여성의 신분까지 노출되는 2차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물론 네티즌들이 마치 사냥감을 찾아 헤매다가 아무나 걸려들면 우르르 몰려가 마구잡이로 사이버 폭력을 행사하는 무절제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가해자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며, 적법한 절차를 밟아 엄중한 처벌이 내려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다. 네티즌들 스스로도 이는 어디까지나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한 심판을 가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비록 행위의 정도에 문제가 있을지언정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이버 폭력 문제를 단지 네티즌들의 올바른 윤리 의식에 호소해서 해결하려거나 국가 권력의 힘으로 규제하려는 발상은 실로 안이한 태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사회정의 명분 폭력화는 위험-

사이버 폭력을 둘러싼 고민의 지점은 한층 더 근본적인 곳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잇달아 벌어지고 있는 네티즌 여론재판 양상은 사회적 처벌권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사회적 처벌권을 국가가 독점적으로 행사하게 된 것은 기껏해야 근대 이후 200여년 전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양한 방식의 사적 처벌과 국가의 공적 처벌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공을 연마하여 부모의 복수를 갚는 행위, 양반집 마당에서 노비를 멍석말이로 때리는 행위 같은 것들이 근대 이전에 존재하던 사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처벌이었다. 이러한 근대 이전의 사회적 처벌권이 인터넷을 통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처벌권의 대이동 역시 작두 위의 무당처럼 양면성을 띤다. 개똥녀나 철사마 사건처럼 공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공간에서 훼손되고 있는 사회 정의를 수호하고 응징할 수 있는 신통한 힘이 시민들에게 주어졌다는 측면에서는 참여 민주주의의 확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사회적 처벌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감정적이고 폭력적으로 흐를 경우 그들이 명분으로 삼는 사회 정의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마치 작두 위에서 발을 헛디뎌 몸을 크게 다치는 선무당처럼 말이다.

< 경향신문 2006년 3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