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식-빨래터 위작 시비가 남긴 것


동문기고 최병식-빨래터 위작 시비가 남긴 것

작성일 2008-07-12

[시론] '빨래터' 위작 시비가 남긴 것

'아니면 말고'식 문제제기 곤란 미술품 감정 풍토개선 계기로

▲ 최병식 (미술73/ 28회, 경희대 교수·미술평론가)

미술품 감정가들은 "최악의 경우 10여 점의 위작이 진품으로 판정되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단 한 점의 진품이 위작으로 판정되는 불행은 막아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감정가들은 단 한 점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이기에 실수할 가능성은 있다. 1%만이라도 진품일 가능성이 있다면 그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위작 시비 때문에 국가적인 문화재가 휴지조각이 될 지경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지난 3일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는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를 과학감정 한 결과 진품임이 확실해졌다고 발표했다. 이번 과학감정 결과는 연구소가 지난 1월에 진행한 '안목 감정'의 판정 결과를 재확인하고,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한 의미를 띤다. 앞서 '빨래터'를 안목 감정한 전문가 20명은 19대 1이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진품 판정을 내렸다.

이번 '빨래터' 논란은 미술품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을 미술계에 제기했다.

미술품 감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정 전문가에 의한 '실물 분석'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전문가'란 미술품 실물 감정을 직·간접적으로 수백 회 이상 경험한 사람으로 이 분야의 권위자를 뜻한다. 미술사, 미술 비평, 화상 등은 미술품 감정과 연계된 분야지만, 엄격히 말하면 완전히 다른 분야인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일부 미술계 인사가 "실물을 보지 않고도 진위 판단이 가능하다"는 말을 한 경우가 있었다. "사진만 보아도 범인인지 아닌지 틀림없이 알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우매한 발언이다.

특정 미술품이 위작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경우, 위작을 진품으로 판정하는 과정보다 오히려 더욱 면밀해야 한다. 그래서 "감정(鑑定)은 감정(感情)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다.

지난 1월 미술 전문잡지 '아트레이드'가 기사 중 '빨래터'가 위작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을 싣기 전에, 과연 이 같은 엄정한 절차를 거쳤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감정이란 작품의 스타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재료나 기법, 연대, 출처 등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단서를 찾고 고심하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특히 '빨래터'가 위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에 앞서서 감정의 A, B, C인 '빨래터' 실물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재료분석 등 기초적인 과정을 꼼꼼히 거쳤더라면 더욱 정확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경매 전에 반드시 예비전시인 프리뷰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실물감정 과정이 불가능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의혹은 불완전한 상태이며, 비공개된 형식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사실 우리나라 감정 실태는 개선돼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검증된 의견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자유롭게 개방하되, 최소한의 절차를 무시한 '아니면 말고'식의 이의 제기는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차단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미술품 감정가들이 감정서를 발급하면서 동시에 법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고, 실수를 할 경우에 대비해 보험에 들도록 할 필요가 있다. 미술품 감정서를 발급할 때도, 감정 결과에 대해 보다 소상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이 밖에도 관련 법률과 판례, 감정 절차, 이의 제기 과정과 범위, 감정 윤리 등을 담은 읽기 쉬운 매뉴얼을 제작해 감정의 폐쇄성을 줄이는 노력 역시 시급하다. 이번 '빨래터' 위작 시비야말로 은근 슬쩍 잊혀지는 '미궁'의 사건이 되지 않고, 미술품 감정에 얽힌 다양한 과제들을 해결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선일보 2008. 07.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