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숭례문 현상


동문기고 이택광 - 숭례문 현상

작성일 2008-02-25

[블로그 속으로] 숭례문 현상

- 이택광 / 경희대 교수 -
 
이제 이걸 ‘현상’이라고 부르는 걸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숭례문이라는 실체는 사라졌지만, 그 소멸을 통해 숭례문은 상징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남대문 시장’ 앞에 서 있던 중세 건축물 하나를 ‘숭례문’이라는 상징적 기원으로 소급하는 건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모든 이들이 갑자기 남대문을 남대문이라고 부르지 않고 숭례문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건 명백하게 무의식의 작용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알아서’ 이렇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수많은 ‘애도’의 행렬은 ‘위험한’ 무의식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이건 역설이다. 이 무의식이 명령하는 건 금지 당한 쾌락, 민족주의라는 향락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이 명령을 이행하기보다 금지하기 위해 숭례문의 폐허 위에 꽃을 바친다. 말하자면, 지금 대중은 숭례문의 소멸을 계기로 갑자기 튀어나온 민족주의를 즐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향락은 쾌락이면서 동시에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숭례문 방화는 한국 사회와 구성원이라는 상징적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셈이고 대중의 애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이다. 이처럼 숭례문 방화는 상징계에 대한 ‘테러’였다. 방화범 채씨가 “문화재가 국가를 대신”하기 때문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한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숭례문 현상’은 우리에게 민족주의라는 것이 ‘금지 당한 쾌락’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민족이라는 상상공동체를 재현하던 기표의 소멸이 새삼 호출한 이 고통스러운 쾌락은 ‘국가’라는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섬세한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다분히 상상공동체의 문법을 따르는 기표이다. 이게 기표인 것은, 이 기표가 지시하는 것과 실제의 한국 사이에 괴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을 위해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발상을 가진 후보를 압도적 지지율로 뽑는 국민과 숭례문으로 표상되는 그 ‘나랏님’은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차원이 현실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봉합되어 있는 곳이 ‘한국’이다.

그러나 어쨌든, 상실은 컸다. 이 충격이 만들어낸 균열을 타고 새로운 정체성이 출몰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건 ‘사건’도 아니고 ‘탈주’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증상으로서 저기에 나타났을 뿐이다. 이 증상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고, 또한 국가라는 ‘절대적 공공성’에 대한 대중의 열망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절대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매개가 소거 당한 공공성이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복지국가 좋은 줄 누가 모르나?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잖아. 나 혼자 세금 많이 내고 손해보긴 싫어.”

이런 멘털리티로 인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이기주의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정희’라는 기표는 ‘독재’에 대한 대중의 향수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절대적 공공성을 확보해줄 ‘메시아’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다. 대중이 이명박을 선택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확인하는 숭례문에 대한 대중의 애도는 이 선택에 대한 재고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 성금’ 운운했던 발언은 이런 대중의 애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표적인 헛발질이었다.

[[경향신문 200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