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동문기고 안호원칼럼-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작성일 2009-08-07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필자의 경우 6.25전쟁이 터지기 전 태어났지만 너무 어린 나이라 전쟁의 무서움이나 참혹함에 대해 생생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1960년도 쯤 으로 기억된다. 거리에서 낡고 헤진 군복을 입고 목발을 집고 있거나 갈 꾸리 손(의수)를 휘두르며 다니는 상이군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때로 몰려다니면서 상점이나 잡화 상 주인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돈을 뜯으며 다녔다. 구걸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오히려 큰 소리 치며 온통 공포의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런 그들이 보이기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모두 자리를 피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영락없는 추한 걸인이었고 불량패들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왜 거리로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지 이해 할 수도 없었고 미움이 앞섰다. 그러나 그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아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따라서 국가가 그들을 보호하고 보상해야 함에도 불구, 이들을 거지로, 깡패로 취급하면서 외면하고 심지어는 건강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국가 유공자들인 그들을 멸시 천대하며 힘든 삶을 이어가게 했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그런 그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국가 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됐다. 그런 인정을 받는데 장장 50여 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이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다 유명을 달리한 많은 유공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만약 그들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 특히 유해를 찾지 못해 한을 품고 사는 유족들의 심정은 또 어떠할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6.25 전쟁 전사자는 무려 13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시신은 여전히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국방부 유해 발굴단이 6.25전사자의 유해 매장 추정 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해 매장지도’ 를 제작하는 등 발굴 작업을 추진한다고 하니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책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끝까지 잊지 않는다는, 끝까지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호국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참에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 상사...’ 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파월 장병들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베트남 전장으로 떠나는 배에 젊은 청춘을 실어 보냈던 32만 명의 참전 용사와 그 가족들이다. 사선을 넘나드는 이억 만리 전쟁터에서 꽃다운 젊은이들 5천여 명이 전사했고 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피 눈물 어린 애통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이 애통의 역사마저 국가가 외면한 채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천대 받는 신세가 되었다. 60대에서 많게는 70대에 이르는 파월 장병들 중 이미 10만여 명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현재 생존자 중 12만여 명이 고엽제후유증 환자로 인정받고 진료혜택 등 보상을 받고 있으나 기대치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나마도 ‘고엽제 후유증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2012년으로 효력이 종결되는 한시법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30여년 이 넘는 세월을 고엽제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완전 고엽제 피해자로 판정 받지 못해 법적 보호 자체에 제한을 받고 있는 참전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참전 장병들에게 보상금 지원뿐만 아니라 학자금까지도 지원해주며 각종 혜택을 주면서 국가가 조국을 위해 희생 된 장병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국가가 한 번 쯤이라도 이들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이들에 대한 법적구제도 이들이 월남에서 돌아 온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인 1998년 1월부터 시작되어 그동안 이들은 사회적 냉대와 취업 곤란 속에서 고엽제 피해를 대물림 받은 자녀 교육마저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빈곤의 악순환까지 겸친 힘든 삶을 살아 왔다.

그런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발 돋음 하는 계기가 마련 됐고 또 한편으로는 한. 미 동맹의 첫 단추를 끼워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위상과 용맹을 세계만방에 떨쳤다는 사실을 국가와 우리는 안타깝게도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이들 고엽제 피해자인 월남 참전자들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국가적 보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아울러 6.25 전쟁과 월남 전 참전 피해자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이라는 공익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애절한 소망이 있다면 자신들이 조국을 사랑한 만큼만이라도 조국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일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는 시인 김춘추의 시(詩)처럼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과거다. 아울러 그런 과거를 기록한 역사가 때로는 미래를 담보하기도 한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한반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쟁을 현재에 와서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 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말하는 것을 뛰어 넘어 현재적 의미와 미래의 전망을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로 남한과 북한은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간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 각기 다른 명칭을 쓰고 기념하는 날짜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는 남한의 경우 6.25전쟁이라는데 초점을 두고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식을 갖지만 북한은 정전 된 7월 27일을 전승절로 정하고 이날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거창하게 한다.

따라서 과거의 명칭이었던 6.25 사변의 의미도 남북이 다르다. 남한에서의 사변은 변고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사변을 역사적 의미를 지닌 긍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똑같은 상황이 이처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6.25사변, 6.25전쟁이라는 호칭 대신 ‘한국 전쟁’ 으로 불러지기를 바라는 학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가 국가예산의 1.5% 정도인 3조3천억 원 정도를 집행하는데 이중 90% 정도가 국가유공자들과 유족들의 생활지원비와 의료보호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너무 많아 충분한 지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이에 대해 국가는 국가 유공자들이 최소한의 생활 안정을 유지 할 수 있고 올바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정책적으로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정부가 국가 유공자의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다. 국가 유공자에 걸맞은 대상이 누구인가를 판단 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정부 시절 정치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국가 유공자로 둔갑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하는 말이다. 어중이, 떠중이까지 국가 유공자가 된다면 예산 낭비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국가 유공자를 존경하지도 않고 예우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울한 상황 속에서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과거 정권 입맛대로 집필한 현행 역사교과서가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전가하는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로 되어있고 일부불순 교사(전교조)들이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면서 가치관과 국가관에 혼란을 주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었는데 다행히 이번 정부가 들어서 좌편향 교과서가 일부 진보계열인‘전국역사교사모임’ 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객관성과 균형성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6.25는 북한의 남침임을 명문화 한 역사 교과서로 개정 된다.

이로서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되풀이 돼온 이념 편향 시비가 종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생각 할수록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