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의 조화라고 말한다. 또 모든 것은 하나 속에 포함되기도 하고 또 낱낱의 하나는 그것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봄이 되면 들에 꽃이 핀다.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산골에 피는 들꽃들은 더욱 더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또한 산이 높고 골이 깊을수록 그 언저리에 피는 산(山)꽃들의 생기와 향기는 더욱 짙고 신선하기까지 하다. 봄에 피는 꽃들은 나지막하게 피고 키가 작다. 다른 풀도 자라지 않아 얕게 피지만 햇볕을 쬐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여름에는 키가 좀 더 큰 꽃들이 핀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여름에 피는 꽃들은 키가 커야 햇볕을 쪼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여름 꽃들은 학 같은 긴 목 줄기처럼 길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강한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도 않고 휘어지는 유연성이 대단하다. 그리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엔 더 튼튼한 국화 등이 핀다.
사는 게 적자생존이라 했던 것처럼 꽃들은 저마다 치열하게 적응된 역사의 인과에 따라 계절에 맞게 피어난다. 그 같은 꽃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참으로 질서의 자유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정확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도 흙도 햇볕까지도 고루 나누고 텅 빈 허공의 땅 한 치라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엄숙한 룰이 있다.
또 있다. 계절에 적응하며 핀 꽃들이 깊은 가을이 되면 그 잎들이 떨어져 이불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땅에 떨어져 썩은 잎과 뿌리는 새로운 봄에 필 잎과 줄기를 지탱해주는 영양분이 되어준다. 보잘것없는 저 풀꽃들의 세계에서도 이렇듯 공생공존의 법칙이 있고 때를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 교체가 되고 있다.
특히 서로가 서로를 돕는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의 법칙을 보면서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의 경우 때로는 권모술수와 비열한 배신과 무절제한 지조가 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주기는 주는데 주는 마음이 없고 가기는 가는데 가는 마음 없이 가는 경이로움이 있다.
사람들처럼 생색을 내려하거나 시끄럽게 하지도 않는다. 우선 거짓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청정이요, 순응이 있고 떠날 때를 알기에 집착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자유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연에 들꽃들이 진실로 아름답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도(道)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공자는 말했지만 깨달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사물의 안에는 이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아무튼 우리의 삶은 경이롭고 신비한 아름다움의 망으로 짜여진 속(內)이고 또 겉(外)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는 이처럼 치밀한 조건과 엄숙한 환경에서의 순응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체험하는 일은 그것 자체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깨닫는 일이다. 흔히 현대를 가리켜 3S 시대라고도 한다. 섹스와 스크린과 스포츠 시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는 또 하나의 현실도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엔가 미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썩을 대로 썩은 정치판의 현실을 외면하자는 것이요, 숨막히는 답답한 교육계의 한심한 정책을 잊어버리자는 것이며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현실에서 떠나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면서 어디엔가 열광하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그러나 그 열광이 휩쓸고 간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정치판의 스캔들과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교육정책이 아닌 사람을 기계로 찍어내는 골육(滑育)정책으로 전락한 교육계의 부패, 그리고 휘청거리는 경제와 각종 흉악범죄가 날뛰는 답답한 사회 문제들 뿐이다.
우리에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답답한 현실을 잊으려고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 봐도 깨어나면 똑같은 그 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듯이 힘없는 우리에게 변한 환경은 여전히 없다는 게 현실이다. 언제나 정의와 진리는 힘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인가보다.
3세기 무렵 ‘승조’라는 스님이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 모든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라고 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사랑은 물론 아픔이나 증오까지도 빨리빨리 잊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의 의미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를 빨리빨리 잊고 날마다 맞이하는 오늘만을 살아야 한다.
일상(日常)에 찌든 삶을 사는 우리지만 가끔은 멈춰 서서 대자연에 섭리로 핀 들꽃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보자. 비록 삶이 힘들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봄이면 키가 작은 꽃들이 피고 여름이면 쑥쑥 자라서 피고, 가을이면 단단하고 여문 꽃들이 피고 겨울이면 강하고 매몰찬 꽃들이 피어나는 꽃들의 끈기와 질서의 조화가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어쩜 환경에 적응해서 강하고 매몰차게 자라며 꽃을 피우다 때가 되면 말없이 지는 들꽃들의 삶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매시지를 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여유의 마음은 꼭 한가한 사람의 것만은 아니다.
힘들고 고단한 삶을 견주어 들풀이나 산에 피는 꽃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여유를 갖고 사물을 보면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을 많이 발견 할 수 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어찌 된 세상인지 '희망' 을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회구조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다.
그러나 깊은 어둠이 지나면 밝은 빛을 맞이 하듯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더욱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른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