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그 길은 화해와 용서의 길


동문기고 안호원칼럼-그 길은 화해와 용서의 길

작성일 2010-04-09
지난 달 마지막 주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마지막 고난 주간이었고 4월 첫 주일은 예수님이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신 부활주일이다.

이 날은 모든 교회가 부활주일로 성찬식을 비롯한 기쁨의 예배를 드렸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기독교 하면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고난의 형틀인 동시에 그 형틀의 죽음을 깨트린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똑같은 십자가라도 가톨릭과 개신교가 지니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는 다소 다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양팔을 크게 벌린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형상이지만 개신교는 아무런 형상도 없이 십자가만 있다.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가톨릭의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개신교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면서 구조가 사뭇 다르다. 똑같은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 의미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부활로 이루어지지 않는 죽음의 고난은 무의미한 죽음일 뿐이고 또 죽음의 고난을 겪지 않는 부활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늙은 개가 며칠째 굶었는지 허멀건 눈으로 한쪽 발을 절룩이며 차도 가운데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조리게 했는데 마침 어떤 한 분이 그 개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위험한 차도를 건너 그 개에게로 다가서려고 하자 오히려 그 개는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누런 이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다 길 건너편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길 건너편으로 달아나는 개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나는 게 있다. ‘정말 네가 살려면 잡혀야 하는데...’ ‘잡혔어야 오래 사는 건데...’ ‘정말, 그게 사는 길인데...’ 안타까운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붙잡히지 않고서는 위험스런 차도에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 달아나는 늙은 개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일부 정치인들이나 천방지축 제 잘난 맛에 설쳐대는 종교인과 그 집단, 그리고 불순 세력의 사회단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잡혀야지 서로가 살고 이 사회가 밝은 사회가 될 텐데, 안타깝게도 잡힐 생각을 안 하고 죽을 줄 모르고 날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다.

예수가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다. 골고다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해골’ 이라는 뜻이다. 해골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죽음인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기도 하다.

죄로 인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의 해골 정수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꽉 꽂힌 것이다. 예수는 그 해골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 해골을 적시며 돌아가셨고 그 고난의 죽음을 통해 부활하셨던 것이다.

그런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골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단지 장식품,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는 기독교인이 아직도 많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낀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배움이 좋다고 예수를 따라 3년 반 동안 공생했지만 그 분의 큰 뜻을 이루 헤아리지 못하고 정작 영광의 길이 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모두 가 예수를 배반하고 돌아섰다.

또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 해도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 것 같은 마음으로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라’ 하며 마치 황제를 대하듯 열렬히 환영했지만 빌라도에게 잡히어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모두가 실망을 하고 예수를 외면한 채 모두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예수를 안다거나 제자라는 것을 숨기기까지 했다. 두려웠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화해와 용서’다. 그래서 마지막 십자가위에서 남긴 기도내용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라는 용서의 기도였다.

그 결과로 우리 인류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길이 열렸고 진정한 인류화합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화해와 용서’는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이루어진 성과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화해와 용서를 위해 십자가 고난의 희생을 당하신 예수님을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 주셨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합’ 에 대한 중심의 길이 되게 하셨다.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지 나, 천지호야”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한 대사다. 은혜와 복수의 관계에서 최악의 경우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배은망덕이다. 더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것은 하등 동물이하의 수준이다. 추노의 논리를 가만히 집어보면 ‘은혜는 멀고 보복은 가깝게 있다’ 는 것이다. 은혜는 힘에 부치고 복수는 힘을 다한다. 사람이 느끼게 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는 그나마 의리와 양심이 조금은 있어 보인다.

그 위 단계는 은혜도 갚고, 원수도 갚는 단계인 도덕적인 세계가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일반적인 수준이다. 그 마지막 상위 단계가 은혜는 갚되 원수는 용서하는 단계이다. 십자가의 예수가 바로 그런 상위 단계 수준이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핏 값으로 목숨을 산(生) 우리는 예수의 노예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망 노비를 쫓는 ‘추노꾼’ 이 아니라 ‘주님’에게 잡혀가는 ‘주노꾼’ 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을 맑은 마음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은혜는 갚고, 복수를 못해도 용서는 하지. 나, 그리스도인이야” 우리 부활 절기를 맞이하면서 정치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닮은 마음이 되어 화해와 용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 세상을 밝고 맑은 세상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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