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우리의 만남은


동문기고 안호원칼럼-우리의 만남은

작성일 2010-03-25
몇 해 전 녹용을 취재하기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 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청색하늘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가이드가 “처음 볼 때는 누구든지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지요. 그러나 평생을 변하지 않고 똑같은 색깔만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계절이 있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따라 갈 수는 없을 겁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어쩌다 본 풍경이기에 아름답게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가이드 말처럼 한가지 색만 오래도록 보고있다면 결코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색깔이 어루러져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그림이 되듯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와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개개인이 서로 다른 것들이 너무도 많다. 외모는 물론이고 행동, 성격, 기본적인 가치관, 어떤 상황에서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들도 각양각색 다르다. 모두가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다.

그런 다른 것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다툼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다름’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루며 서로의 다른 것들이 인격이라는 작은 틀에 담아져서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서로 다르기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다름’은 갈등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동인(動因)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다름 때문에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도 한다. 그렇게 아귀다툼으로 싸우면서도 우리는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나로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이들은 모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한다.

과거에는 우연과 인연은 나와는 전혀 무관하고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이 동영상처럼 스쳐가야 할 사람이 가로 세로의 일치되는 꼭지점에서 마주쳤다는 것은 필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런 인연, 필연에도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결코 만나서는 안될 악연이 있는가하면 생면부지의 이웃과 나눔의 선한 인연도 있겠고,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만남의 인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 것이지만 느끼기에 따라 길고 짧은 차이가 생기게된다.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라면 천년도 짧을 것이고 괴로움의 만남이라면 아마 그 짧은 시간이라도 천년같이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만남이라면 행복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길고 지루했다면 그 관계의 시간은 행복하다 할 수 없다.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 가운데는 일회성 용품들이 많다. 한번만 쓰고 버리게 되어 있는 것들로 주로 종이컵이나 도시락 통과 스푼 등이다. 이들 용품은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편리함을 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견고함에도 불구 한번만 쓰고 버린다는 것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용품들이 폐기가 되면서 자연 훼손까지 할 정도의 용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래도록 사용해야 할 용품들은 일회성 용품과는 다르다. 반드시 사용하기 전 일일이 점검을 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관리를 한다. 그리고 한 번 사용 후에도 다시 재사용 할 수 있게끔 청결하게 관리를 한다.

우리가 매일 같이 눈만 뜨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이런 두 부류로 구분된다. 한 두 번 만나고 말 일회성 사람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다시 만나야 할 필요성도 없다. 그저 헤어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두고 두고 오래 만날 사람이라면 관심을 갖고 그 내면을 다루며 관리를 철저히 잘 해야한다.

좋은 만남의 사람들은 내면의 태도, 성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드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를 일회용품으로 여기는 사람의 경우 자기를 내버려두고 모든 것을 귀찮게 여기며 마음에 문까지 굳게 닫아 걸고 자신의 감정마저도 억제치 못한다.

지금도 우리는 이 시간에서 이렇게 멈춰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흘러가는 강물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똑같은 형태의 사람일 수는 없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함부로 남을 판단 할 수도 없고 심판관이 되어 판결을 내릴 수도 없는 아주 미천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거나 정죄를 한다는 그 자체가 어찌보면 과거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또 다른 형태의 사람을 자로 재듯 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신(神)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의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남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기 일쑤다. 색깔있는 자기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즘 세종시 문제로 여ㆍ야가 갈라져 원외에서 싸움질만하고 신성시되어야 할 교육계가 비리를 폭로하며 서로 물고 뜯고, 모 사찰 스님과 야당 중진의원과의 진실 허구 공방, 살인자와 피해자간의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반영구적인 용품이 되기보다 한번 쓰고나면 버리는 일회성 용품 같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단체장 또는 지역의원으로 나서서 자기 신분을 망각한 채 가뜩이나 더러운 이 사회를 더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다.

과연 이들의 만남의 관계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악연인가. ‘무소유’의 정신을 우리에게 남기고 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이 추태를 보신다면 과연 중생들에게 무엇이라 설법을 전했을까. 아직도 하실 말씀이 있었을까.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