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사랑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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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원칼럼-사랑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안호원 0 640
계절 탓일까. 유달리 부고(訃告) 문자 메시지가 많이 날아든다. 부모 또는 본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문자를 받으면서 미처 예기치 못 했던 이별에 황망해지기도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거역하지 못하고 맞이해야 할 죽음. 불행일까, 다행일까 그런 사실을 잊고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과욕을 부리며 힘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물고기 중에 곤들매기라는 것이 있다. 이 물고기는 육식성 물고기다.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어떤 사람이 열대어들이 떼 지어 있는 수족관에 이 고기를 넣었다.

곤들 매기는 신이 나서 주변에 있는 물고기들을 잡아먹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람이 수족관 가운데 유리 칸막이를 해놓고 열대어와 분리해놓았다.

그러나 곤들 매기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눈앞에 있는 고기를 먹으려고 달려가다가 그만 머리를 부딪치고 만다. 며칠 동안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정작 다른 고기를 섞어 놓아도 곤들 매기는 아예 체념하고 굶어죽고 만다.

혹시 우리도 이 곤들 매기처럼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을 잊고 사는지 모른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사사(sasa)의 시간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사사의 시간에서는 육체적으로 죽은 이마저도 기억되는 한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죽음은 자마니(zamani)의 시간에 들어간 이후다. 다시 말해 아무도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마니, 즉 영원한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들어가며 그때 비로소 진짜 죽은 것으로 된다.’ 고 믿는다는 것이다.

결국 육신은 한 줌의 흙이 되고 말았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生者)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과연 삶을 마감한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서 일까. 생을 마감한 적잖은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무덤 앞에 묘비를 세우고, 삶의 기간과 고인의 이름 등을 기록해 놓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지우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사진 앞에 ‘권사 000’라는 명패가 놓여있었다. 입구 쪽 양편으로 조화가 가득하다. 본인이나 유족의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따라 조화의 숫자가 다르다.

종교를 떠나서 막상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천국, 좋은 대로 가기를 원한다. 그런 천국, 자칫 지금의 풍요에 젖어 천국은 그저 내가 이 땅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야 가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은 그런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왜 우리에게 그런 두려움의 죽음이 오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극락)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평안히 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사실을 믿는다면 죽음은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시작이다. 오히려 언젠가 영원한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서 모든 괴로움을 털어버리고 축복 속에서 그리운 사람들과 재회를 기대할 수 있는 은혜가 될 수 있다.

한 신부가 임종을 앞두고 있는 신자에게 ‘성도님은 아직 산 자의 땅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신자가 ‘아니오, 신부님 저는 아직 죽은 자들의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산 자들을 떠날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살며, 결코 죽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땅에는 죄와 사망과 눈물의 땅이지만, 저편에 있는 나라는 결코 죽는 일이 없고 높고 높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생명수를 마시며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다. 그런 염원이 있기에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처럼 우리도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하던 이들을 잊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오래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 어머니가 마지막 가는 길 앞에 선 딸에게 “환한 빛만 따라가야 해”라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 와락 가슴이 메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천국에서 사랑의 생명수를 마시며 영생의 삶을 살 것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도 그렇게 사랑을 나누며 살 수는 없을까.

나이가 들수록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빈번해진다. 헤어짐의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이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어쩜 우리네 인생은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여정일 뿐이다. 삶에서 사랑만이 아니라 고통도 동반될 수밖에 없다.

누구든 세월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늙고 병이 든다. 또 시대가 변화되면서 노인을 귀찮아하고, 떠 맞기 싫어 자식들마저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요즘 일부 젊은 층 사이엔 노인을 ‘노인 충’(蟲)이라 불릴 정도의 참담한 말이 유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주는 것도 없으면서 어른 대접만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경은 고사하고 밥 값 못하는 밥벌레 취급을 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과학과 문화, 매스컴의 영향으로 세상이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바뀌면서 개인주의를 벗어나 이기적 자세가 되어 부모 간에서도 득(得)과 실(失)을 따지는 무섭고 잔혹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이 되다 보니 나이 든 자의 지혜와 경험 따윈 일찌감치 용도 폐기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누구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살아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점점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처음부터 늙은이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젠가는 젊은이도 어김없이 노인이 되고 병들고 죽음의 길을 간다. 자식들을 키운 노인들은 당연히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게 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어른들에게 틈을 내서라도 찾아뵙기 정히 어려우면 전화라도 하자. 다시 한 번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삶은 한순간, 새벽이슬 같다.’ 그렇다. 삶과 죽음은 나란히 서로를 마주하고 있을 만큼 짧은 한순간인지 모르겠다.

그런 삶에 대해 영원할 것처럼 쓸데없는 것에 너무 집착하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어쩜 필자는 그것을 되묻고 싶어 오늘도 힘겹게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삶과 죽음이, 천국과 이 땅이 실은 너무나 가깝게 나란히 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는 않지만 계절마다 외로움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에게 울음을 멈추라고 어깨를 다독이는 화가인 아버지,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서도 할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고 붓을 잡지 않았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야 붓을 잡으신 아버지.

그런 효자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물론 발신지는 없다. 그러나 겨울 편지에서 붉은 낙엽 우표를 붙여 아버지가 잠든 숲으로 발송할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노모를 모시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며 시동을 건다.

오 남매를 키우신 늙은 어머니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세상에 나이 든 분들과 이웃에게 좀 더 친절을 베풀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사랑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그친다면 그것은 심히 빈곤한 사랑일 뿐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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