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대통령과 법치주의


동문기고 노동일-대통령과 법치주의

작성일 2007-07-11

[시사풍향계―노동일] 대통령과 법치주의 

- 노동일 (법학 77/ 29회) / 경희대 교수·법학 -

‘헌법소원심판청구서. 청구인 노무현. 피청구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TV 화면에 비친 한 장의 서면을 바라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선관위의 결정이 대통령이 아닌 자연인 노무현씨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주장도 난해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미증유의 대통령 탄핵을 목격한 바 있다. 헌재의 관습헌법론에 따라 행정수도 구상이 좌절되기도 했다. ‘전례가 없다’는 대통령의 헌법소원 자체를 비판할 이유가 되기 어려워 보인다. 인격모독식의 감정적 언사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소원은 우리 법치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제도화된 헌재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 헌재는 탄핵, 행정수도 결정 등을 통해 그 위상을 확고히 한 바 있다. ‘선관위의 위상을 드높인 결정’이라는 투의 비아냥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최종적 권위로서 헌재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정치적 분쟁을 헌재로 가져가는 게 바람직한지 여부는 물론 다른 문제다.

이번 사건 역시 탄핵 등에서 보듯 살아 있는 헌법학 교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하결정보다는 헌재가 본안까지 판단해주었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대통령은 청구인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각하가 당연하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헌재는 날치기 통과로 입법권을 침해받았다며 국회의원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각하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 내지 실현할 책임과 의무를 지는 국가기관이나 그 일부는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없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장이 임기 중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등에 입후보하는 것을 금지한 선거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린 헌재는 언뜻 모순돼 보이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나 선거운동의 자유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통령의 헌법소원이 법치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노 대통령을 위시한 청와대의 자세가 중요하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상 결과를 기다리며 겸허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청와대의 주장처럼 대통령은 정치인이자 정당인이다. 정권 창출 등을 위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최고위 공무원이기도 하다. 최근 일련의 사태에서 보듯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공무원 조직 전체가 선거판에 휩쓸릴 수 있다. 여당 후보대신 현직 대통령이 야당 후보와 격돌하는 모양새도 나타나고 있다. 선관위가 우려하는 것도 이런 측면일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어떤 측면에 방점을 찍기를 원하는지는 헌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럼에도 선거법이 ‘후진적 제도’요 ‘독재국가 시대의 발상’이라는 발언을 이어간다면 헌법소원은 당장의 비판여론을 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헌법은 국가의 최고법이다. 하지만 가장 취약한 법이기도 하다.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서 권위주의 대신 법치주의를 택했다는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민일보 2007-06-25]]